높고 청명한 코발트색 하늘 아래 화사한 단청으로 한껏 치장된 전각들. 그 전각 사이사이를 미로와 같이 에워싼 꽃담들.
궁궐의 이 모든 화려함은 초겨울 이파리가 몇장 남지 않은 단풍과 경쟁을 하는 듯 눈을 시리게 만든다. 하늘을 가르는 맞배지붕의 상쾌한 지붕선과 꽃담의 점선무늬, 한옥의 문창살 등은 직선의 아름다움이다.
직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가 주는 느낌은 곧은 충절과 정갈함이다. 이 담장 안에 살고 있는 여인의 빗질한 머릿결처럼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그래도 한국 선의 본바탕은 곡선에서 찾을 수 있다. 곡선의 미를 살린 가옥을 잘 떠받들어 주는 것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전통의 꽃담으로, 자연과 사람을 자연스럽게 잇고 있는 상징물에 다름 아니다.
지붕같은 하늘채에는 흰구름이 윤무하고 침실 같은 대지와 출렁이는 바다에는 푸른 산과 꼬막 등 같은 사람의 집, 아름다운 물길이 있다. 집 울안을 둘러 쌓은 싸리, 대나무, 과일나무, 탱자나무의 생울과 짚, 보릿대, 밀대, 수수깡, 갈대 바자울은 고즈넉한 농촌 풍경이다. 주변의 돌과 땅 속에서 파낸 흙으로 토석, 석회, 돌담, 전축담에 오지, 도자, 기와, 돌로, 치레한 꽃담과 화장담(화문장) 굴뚝은 여유를 상징한다.
우리네 담은 집을 안밖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열린 공간이다. 담의 높이는 안방 마루에 앉아 밖을 볼 때 눈 높이보다 낮다. 아늑함을 주지만 외부인에게 담의 존재는 열린 공간이면서 내외, 성역, 신역 공간의 의미를 느끼는 무한 경계의 환경 예술이다. 담 속에는 삶의 쉼표와 함께 정한과 열정 그리고 무욕 무문의 기도가 숨쉰다.
궁궐의 꽃담은 그 건축의 모양새와 멋들어지게 어울려 후원과 자연, 인공과 자연을 적절히 구분해 아늑함을 더해주고 있다. 직선과 곡선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질서 있게 무늬를 배열하여 미감을 높이는가 하면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으로 위엄을 갖추기도 했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궁궐의 꽃담은 화려하되 야하지 않고 더욱 은근한 멋을 풍긴다.
경복궁 교태전 뒤편 아미산 동산을 연결시킨 꽃담은 우아하면서 단아한 국모의 성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고, 창덕궁 낙선재 후원의 꽃담은 흥선대원군의 묵란도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듯 정갈한 예술성을 뽐낸다. 하지만 덕수궁 꽃담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유현문은 조선조가 비운의 역사, 설움의 역사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눈치다.
경복궁의 꽃담에 나타나는 화려하고 따뜻한 조화감이 창덕궁과 덕수궁에서는 흑백의 대비에 의한 궁궐의 또 다른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또 꽃으로 치자면 경복궁 꽃담은 장미와 같아서 화려해 꽃담 일부로도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반면에 낙선재의 꽃담은 안개꽃과 같아 은은한 나머지 꽃담끼리 혹은 지붕과 굴뚝이 한데 어울릴 때 더욱 아름답다.
안동 하회마을 두메산골 토담집 주인이 투박한 솜씨로 토담에 꾹꾹 박아 놓은 기왓 조각의 질박한 무늬는 구수한 한국인의 심성이 글대로 배어 있어 그윽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반면 낙산사의 원장과 같은 담대한 작품도 있다.
해님은 '밝을사 광명'으로 온누리를 비추고, 달님은 어두운 밤길을 보송보송 솜털로 덮어준다. 별님은 가지가지 모양과 가야할 방향을 밝게 이끌어 주시네. 사랑은 아침해처럼 고운 빛깔, 낙산사의 화룡점정 원장에 탈속의 꿈이 깃들어 있다. 벽돌로 높게 치쌓은 넓은 면적에 화강석을 둥글게 깎아 새알심 박듯이 일정하게 배열해 그렇게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주의 운행이 거기에 있고 시나브로 행복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아이콘인 셈이다.
쌍계사의 소박한 꽃담은 생활 주변에서 운치를 즐기는 멋이 담겨있고 단순하면서도 알싸한 문양을 볼 수 있다. 분홍 꽃비를 내리는 벚나무가 그리운 4월에는 쌍계사로 떠나야 한다. 비록 개나리 봇짐을 들쳐 메고 이곳을 넘나들던 옛 사람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라도. 맞담에 책을 비스듬히 쌓아놓은 듯한 기와무늬에 중간 중간 수키와를 한 쌍씩 맞대 모두 여섯 쌍이 모여 꽃 한송이를 만들어낸 꽃담아! 길상 무늬 꽃잎으로 사바의 중생을 어서 구제하라.
운강고택 화방벽은 ‘길’자와 꽃잎 모양의 아기자기한 무늬가 서로 만나면서 상생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여주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 화방벽의 ‘부’자와 ‘귀’자는 고요한 마음으로 부딪침을 다스리되 유물적인 부귀를 멀리하는 자타일체의 경지를 추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안동 하회마을 북촌택엔 기왓장을 이용한 삼중원권(반월), 그 위에 다층 전돌 화장벽과 같은 와편 화장벽을 쌓아 치장했다. 같은 면의 안채 지붕 합각에도 와편에 의한 기하문 꽃담과 굴뚝 등을 연출하면서 그윽한 맛을 더한다. 안동 식혜와 헛제사밥을 만들었던 그들의 꽃담이 오늘따라 안개꽃처럼 은은하다. 안동고등어처럼 푸른 마음, 식혜처럼 달콤한 인정, 그리고 헛제사밥처럼 물리지 않는 꽃담.
그대 행여, 시린 마음을 달래려거든 한걸음에 해남 대흥사(대둔사)로 달려가시라. 허름한 가슴은 붉은 꽃을 키우고 있는 꽃담에게 보듬어 달라 하고, 그곳에 상심한 마음일랑 마당에 고히 묻어두어라.
대흥사의 하루는 꽃지짐 요란한 풀꽃들과 꽃담의 투박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처 꽃이 다 피지 않았거든, 부도밭에 돌을 쪼아 새긴 꽃문양이나 천불전의 꽃문살 만으로도 봄의 찬가를 부를 수 있으리라.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한국(전통)꽃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북의 '꽃담' 관광자원화 절실 (0) | 2010.12.05 |
---|---|
전북의 꽃담을 아십니까 (0) | 2010.12.03 |
한국의 미 꽃담 휘호(백담 백종희) (0) | 2010.11.28 |
(3)꽃담의 상징글자 (0) | 2010.11.23 |
(2)꽃담의 전통문양 (0) | 2010.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