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그림 감상을 일러 '간화(看畵)', 즉 '그림을 본다'는 말보다 '독화(讀畵)', 곧 '그림을 읽는다'는 말을 썼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본 제자 이상적이 스승께 올리는 편지에서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음'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고 썼다. 그렇다면 그림을 '읽는' 것과 '보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선 '본다'는 것은 겉에 드러난 조형미를 감상한다는 뜻이고, '읽는다'는 말은 동양의 오랜 서화일률(書畵一律), 글씨와 그림이 한가락이므로 보는 방법도 한가지로 '읽는 것'이 된다. 그림에서 읽히는 내용 또한 형상보다는 그린 이의 마음이 주가 되고, 문인화에서는 이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서화동원(書畵同源)’ 즉,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한자는 상형문자로, 글씨 자체가 하나의 그림인 셈이다. 한국의 전통 꽃담에서는 이같은 생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벽을 화려한 난장(亂場)으로 도배를 한다.
선조들은 길상문자인 수복(壽福), 강령(康寧), 부귀(富貴), 다남(多男), 만수(萬壽), 쌍희(囍) 등을 벽돌로 무늬를 놓아 꽃담을 만들었다. 꽃담은 5천년의 한국 그림과 문양 감상하기가 가능하며, 한자 퍼즐맞추기는 더욱 흥미를 더한다. 문자문은 글자를 무늬로 넣거나 특정한 글자를 연속해서 배열, 문자들을 새김으로써 글자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글자 무늬로 들 수 있는 것은 '수(壽)'자와 '복(福)'자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장수하는 것만큼 더 큰 복은 없었다. 때문에 옛사람들이 표현하는 문양에는 유난히 장수를 상징하는 것들이 많다. 수(壽), 복(福) 계열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문자문으로 '만(卍)'자나 '아(亞)'자를 새기기도 했다. '만(卍)'자는 사방 끝이 종횡으로 늘어나 펼쳐지고 계속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는 형태를 형성하는데 무한장구를 의미한다. '아(亞)'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만(卍)'자처럼 역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무늬를 형성해서 무한장구와 결실을 뜻한다.
운현궁의 꽃담은 노락당으로 가는 중문 끝자락에서 시작해 이로당까지 이어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남쪽의 '길 영(永)'자에서 '즐거울 락(樂)'자까지 10자의 한자가 새겨 있어 선조들이 추구한 삶의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永(길영) 世(인간세) 春(봄춘) 壽(장수수) 富(부자부) 康(편안강) 寧(편할영) 萬(일만만) 歲(해세) 樂(즐거울락)' 등 10자는 '영원토록 봄의 세월과 같아 장수와 부귀로움 속에 평안하여 만세토록 즐거우시라'는 뜻의 상징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문양을 통해 장수의 염원을 담아냈고, 한자 10자로 된 문장을 통해서도 장수와 부귀 평안 등 백의민족의 소망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창덕궁 희정당 굴뚝은 면마다 상단과 하단에는 글자가, 중단에는 무늬전돌이 놓여 있으며, 모두 12개의 꽃담으로 표현된다. 굴뚝 북면의 상단과 하단 꽃담에 베푼 ‘강(康)’자와 ‘녕(寧)’자는 1920년 경복궁에서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이건하면서 그것을 표시한 것까지 함께 옮겨다 놓은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코끼리 무늬 전돌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배치된 ‘영(永)’, ‘낙(樂)’, ‘수(壽)’, ‘부(富)’자와 같은 다른 글자 무늬 꽃담과 마찬가지로 화려함을 더한다.
논산 돈암서원(충남 논산시 연산면, 사적 제383호)은 조선의 참선비 사계 김장생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며, 배향 영역 사당은 말 그대로 꽃밭이다. 길상 무늬 대신에 12개의 글자를 사용하되, 붉은 색으로 큼지막하게 배열해 그 중요성을 강조한 듯 하다. 그 글귀는 ‘서일화풍(瑞日和風)’,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다. ‘서일화풍’은 ‘좋은 날씨 상서러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라는 뜻을, ‘지부해함(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 모든 것을
포용하라는 의미인 만큼 김장생선생의 인품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의미다. 누구의 기찬 발상이었을까. 담을 쌓으면서 한 켠에 글씨를 박아 놓은 담양 소쇄원의 풍류와 여유는. 계류(溪流) 위의 외나무다리와 죽교, 아름다운 토석담과 담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로 돈암서원과 마찬가지로 선비정신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소쇄처사 양공지려’라는 검정 글씨는 ‘회사후소(繪事後素)’ 즉,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깔린 다음에 가능하다’는 공자의 말을 현실화한 징표다.
경북 청도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호)의 화병벽 중앙엔 ‘길할 질(吉)’자가 선명하다. ‘길’자와 간단한 꽃무늬를 넣었으며, 그 아래와 위로는 귀갑문과 비슷한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열했다. ‘길(吉)’자는 ‘선비(士)의 말(口)은 참되고 좋은데서 길하다’는 의미로, 네 개의 ‘길’자를 반듯하게 자리하게했다. 경기도 여주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의 화방벽엔 ‘부(富)’자(오른쪽)와 ‘귀(貴)’자(왼쪽)를 무늬로 새겨놓는 것은. 화방벽의 글씨와 무늬를 통해 고요한 마음으로 부딪침을 다스리고 유물적인 부귀를 멀리하면서 유심적인 자타일체의 경지를 가르치며 추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계룡산 중악단(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 보물 제1293호) 대문간채의 중앙칸 및 중문간채의 중앙칸 판문에는 신장상(神將像)을 그렸고, 이들의 화방벽 및 둘레의 담장에는 와편으로 수(壽), 복(福), 강(康), 령(寧), 길(吉), 희(喜) 등의 문자와 무늬 등으로 장식한 만큼 우리말 '지화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리라.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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