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학교 도서관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끼던 펜이 사라졌다. 그 펜은 A의 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사용해오다 A가 학교에 입학하자 물려주신 소중한 펜이었다. A가 펜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옆 반에 힘센 B라는 녀석이 그 펜을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하며 뽐내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이 펜은 누구의 것일까?
이 질문에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대답이 예상되지만 혹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현재 이 펜을 갖고 있는 사람은 B이니 이 펜은 B의 것이다.’
당연해야 할 논리가, 당연치 않은 문화재 반환 실태
물론 위의 답변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황당한 논리가 지금껏 국제사회에서는 당연하게 통용되었다. 논의를 조금 더 확장시켜 위의 사례에서 펜을 ‘문화재’로 A와 B를 각각의 ‘국가’로 치환하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반 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그러나 길고 긴 세월만큼이나 우리역사에서 침략과 약탈은 지울 수 없는 멍에이다. 특히 근대화의 바람이 거셌던 19세기 말 무렵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국권의 약화와 상실로 인해 그간 유례없던 대규모의 문화재 소실과 분실이 이루어졌다. 2007년 12월 현재, 이 기간 동안 국외로 반출되어 환수되지 못한 우리의 문화재는 도합 75,000여점에 이른다. 2008년 기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유물이 210,000점 가량인 것을 감안할 때 아직도 상당수의 문화재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학계, 민간단체들은 이 문화재들의 환수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성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우리의 문화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인 것이다.
반출은 쉬웠으나, 돌아오긴 쉽지 않은 문화재 반환의 현실
그럼 이제껏 환수된 우리문화재의 대표적인 반환 사례를 살펴보자. 해방이후인 1958년과 1966년 우리정부는 두 차례의 걸친 협상으로 일본으로부터 문화재 1,432점을 환수 받았다. 하지만 경제지원을 전제로 한 환수였기 때문에 서둘러 협상이 종결되었고 추가로 확인되는 일본민간인 소유의 약탈문화재에 대해서는 일본정부가 법적구속력이 없는 기증 권고만할 수 있도록 협상안건이 작성되었다.
1993년에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하여 외규장각 도서 중 한권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上)권을 반환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한국의 고속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이벤트에 그쳤었다. 양국 정상 간에 추가환수가 구두로 합의되었지만 아직까지 추가적인 반환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위의 두 사례는 문화재 환수라는 목적 이외의 정치적, 경제적인 요인이 개입되었고 추가적인 문화재 반환근거를 성문화하지 못해 실패한 환수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다음 사례를 살펴보자.
돌아온 우리 문화재, 북관대첩비와 겸재 정선의 화폭
2005년 11월, 우리나라는 한 비석의 등장으로 들떠있었다. 그 비석은 바로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는 16세기 말 정문부와 그의 의병대가 일본 침략군과 싸워 승리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1709년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 비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우리나라의 저항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유물이지만 일본군은 러일전쟁(1904~1905)기간 동안 이 북관대첩비를 불법으로 반출했다.
그 동안 잊혀있던 북관대첩비는 1978년 한국계 일본 사학자 최서면이 야스쿠니 신사 한켠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 학계와 시민단체, 정부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북관대첩비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2006년에는 원래 비가 세워졌던 자리인 함경북도 길주로 돌아가기 위해 판문점을 통과했다. 북관대첩비는 이후 북한 국보유적 193호로 등재되었다.
북관대첩비의 사례는 경제적, 정치적인 대가가 개입되지 않고 우리 문화재 환수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 민·관이 함께 노력하여 환수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앞으로 우리가 진행해야 할 문화재 환수의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2006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겸재 정선의 화폭 21점이 복잡한 절차 없이 반환되어 문화재 반환의 좋은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변화를 시작한 국제사회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통한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문화재 반출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인도, 캄보디아와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에티오피아, 리비아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패권주의를 앞세운 서구 열강들로부터 침략을 당해 자국의 문화재를 빼앗겼던 나라들이다. 이들 제3세계 국가들 뿐만 아니라 한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그리스 역시 국권이 쇠퇴함에 따라 이웃나라들에게 문화재를 약탈당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이 국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문화재 환수요구가 설득력을 얻어가면서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1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이 채택되었다. 이 협약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삽입되었다.
‘문화재는 문명과 민족문화의 기본요소의 하나를 이루며 그 참된 가치는 기원, 역사 및 전통의 배경에 관한 가능한 모든 정보와 관련해서만 평가될 수 있고 자국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문화재를 도난, 도굴 및 불법적 유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에 부여된 책임이다.’
문화재의 가치와 그 보관, 관리 책임까지 원산국가에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협약은 이후 1995년 ‘도난 또는 불법적으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에 관한 UNIDROIT협약’ 이 도출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달라진 분위기 속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강제점령 당시 반출했던 악숨 오벨리스크 반환을 결정·실행했다. 무조건적인 반환에 복원 비용까지 이탈리아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또한 리비아의 지방인 키레나이카를 점령했을 때 반출했던 키레네 비너스 상 반환을 실행하는 등 이탈리아는 국제사회의 호평을 받고 있다.
문화재 환수, 힘들고 고된 작업이지만 반드시 지속되어야
문화재는 단순한 물건이나 건물로서만 평가할 수 없다. 그 자체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문화의 전통을 되짚어 기원을 탐구하고 자긍심을 드높일 수 있는 작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2001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최초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나 안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 등 연구가치가 무궁무진하지만 환수하지 못한 우리의 문화재들은 너무나도 많다.
자연은 우리의 것이 아닌 다음 세대의 것이라고 한다. 문화재 역시 자연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것을 우리의 손에 돌려놓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더욱 큰 짐을 떠안게 된다. 지금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우리의 문화재들이 있다. 역사는 흐르지만 문화재는 남는다. 후손들이 우리의 문화재를 갖고 마음 편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줘야 면목이 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외규장각 도서란?
문화재 반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 국민들은 자연스레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외규장각 도서가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이토록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는지 이유를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알아보았다.
외규장각 도서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이었던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압수한 340여 책의 국가 문서를 일컫는다. 다른 책들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특히 297권에 달하는 의궤(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의례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남다르다. 의례의 전 과정은 천연색 그림으로 제작되었고 관청간의 업무상황, 물자, 인건비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당시의 생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며 각종 도구의 이름을 연구하다 보면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옛 어휘까지 연구할 수 있어 국어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같은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이 297권의 의궤 중 上, 下권으로 나눠진 <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지난 1993년 9월,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하여 반환하기로 했으나 上권만을 반환하고 下권은 반환하지 않은 채 도로 프랑스로 가져갔다. 당시 양국 정상 간의 구두로 합의된 내용은 ‘등가교환 방식’으로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실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등가교환 방식이란 외규장각 도서의 가치에 준하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를 교환하여 전시해야하는 조건인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 요청한 영구대여 형식도 이와 같은 조건을 포함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 반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 국민들은 자연스레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외규장각 도서가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이토록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는지 이유를 아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알아보았다.
외규장각 도서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이었던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압수한 340여 책의 국가 문서를 일컫는다. 다른 책들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특히 297권에 달하는 의궤(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의례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남다르다. 의례의 전 과정은 천연색 그림으로 제작되었고 관청간의 업무상황, 물자, 인건비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당시의 생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며 각종 도구의 이름을 연구하다 보면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옛 어휘까지 연구할 수 있어 국어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같은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이 297권의 의궤 중 上, 下권으로 나눠진 <휘경원원소도감의궤>는 지난 1993년 9월,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하여 반환하기로 했으나 上권만을 반환하고 下권은 반환하지 않은 채 도로 프랑스로 가져갔다. 당시 양국 정상 간의 구두로 합의된 내용은 ‘등가교환 방식’으로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실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등가교환 방식이란 외규장각 도서의 가치에 준하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를 교환하여 전시해야하는 조건인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 요청한 영구대여 형식도 이와 같은 조건을 포함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글/김주우(문화체육관광부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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