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전주를 직접 찾아가렵니다. 건강한 웃음 푸른 대나무에 희망 가득 담고서. 감히 초록 융단을 펼쳐놓은 웃자란 청보리보다 더 시원한 봄기운을 선사하는 게 대나무. 그대여, 바람 부는 대숲에서 귀를 기울이시라.
대나무는 속이 텅빈 것 같으나 실상은 속이 꽉차 실속이 있으며, 갈라질 때는 양단간의 구분만 있을 뿐. 대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길쭉하게 솟아올라 머리 위를 뒤덮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자랑하는 연유입니다.
전주 경기전 대밭에는 올곧은 선비의 결기같이 솟은 대나무가 봄바람에 흔들리면서 서늘한 소리를 떨굽니다. 밤이면 태조로의 밤을 수놓는 청사초롱 하나둘씩 불을 밝혀 반짝반짝. 댓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눈이 부실 정도로 황홀한 내 심사.
서예가 하산 서홍식씨는 경기전의 대나무를 삼백예순다섯날 바라보면서 마음의 창을 키워서 인가요. 풍죽, 노죽, 묵죽, 청죽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필치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네요.
경기전 뒷담 한옥마을. 키 정도의 돌담 위로 쭉쭉 뻗어 올라 각선미를 뽐내는 나무들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채 붉은 빛을 서서히 토해냅니다. 이윽고, 행복에 겨운 포만감을 맘껏 느껴봅니다.
시시각각 햇살을 받아 부챗살처럼 산산이 부서집니다. 해질녘 부엌 앞에서 강아지도 덩달아 아장거립니다. 바람이 싱그러운 전주 한옥마을, 미로처럼 꼬불거리는 어느 골목에서 키 작은 돌 담 너머 누군가의 살림집 담벼락 길쭉하게 자란 데이지 꽃을 염치도 없이 하염없이 굽어보며 시간을 잊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구겨져 있을 때, 나는 전주 한옥마을의 지도 한 장 펼쳐들고 혈관의 맥을 뚫듯 골목 골목을 손가락으로 쫙쫙 그어가며 구겨진 마음을 펼쳐봅니다.
길 아닌 곳이 없어 어디든 뚫려있고 열려있어 막힘없이 통하는 길, 그것이 바로 전주 한옥마을 골목 투어의 매력이랍니다.
골목을 돌아 나왔을 때 만나는 물길은 또 다른 후련함을 선사합니다. 물길만 따라 걸어도 지루한 줄 모르지요.
골목은 골목대로 연하여 막힘이 없고, 물길이 마음 트이니 전주한옥에서는 매인 게 없을 듯 싶습니다.
그대여, 저는 오늘 한지의 고장 전주에서 옥색 한지를 샀습니다. 고운 옥색의 종이 위에 물길 트이고 바람 트여 아름다운 이곳의 사연을 적어볼까 하여서이지요.
고향의 골목이 사라진 지금, 전주 한옥마을에 삶이 속살거리는 골목이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니, 숨통 트이는 일이지요. 싱그러운 밤, 전주부채 하나 손에 쥐고 골목 어귀에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전주 최부잣집의 커다란 빨간 굴뚝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신심(信心)만큼이나 커 보이는 오늘, 경기전 대숲에 이는 바람 고운 울림을 내며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곱씹어보라’고 소곤소곤 일러주네요.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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