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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과 왕(릉)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 경운궁 이야기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 경운궁 이야기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불러주세요

 

궁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덕수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이름이 경운궁이기 때문입니다. '덕수'란 말은 조선초 정종대왕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대왕에게 오래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린 이름으로서 '왕위에서 물러난 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일제는 고종황제에게 이러한 덕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고종황제를 덕수궁 전하로 순종황제를 창덕궁 전하로 부르며 격을 낮추었습니다. 그 이후 고종황제가 기거했던 궁궐 역시 경운궁아닌 덕수궁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경운궁으로 300년 동안이나 불러왔던 이름을 이제는 되찾아야하지 않을까요?  

 

전통궁궐과 서양식 건물이 공존하는 곳

 

일제의 압박으로 창덕궁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역대왕들의 초상화와 명성황후의 빈전 등을 경운궁으로 모두 옮기며 궁궐의 증축공사를 감행했습니다. 궐안의 선원전, 정관헌, 돈덕전 등의 서양 건물들이 바로 이때 세워졌는데 경운궁에 이렇게 서양식 건물이 많아진 이유는 제한제국과 외국, 특히 서양제국과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 건물들의 대부분이 외국사신을 접견하는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서양 세력의 힘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해보려 했던 고종의 외교적 몸짓을 읽을 수 있습니다. 

 

궁궐내 서양식 건축물 석도전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건물입니다. 영국인에 의해 완공된 3층 석조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거실, 욕실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0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고종과 재회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준명당( 浚 目月 堂 ) 현판은 오자인가?

 

정전의 이름을 말해주는 현판에오자가 있다고 ? 浚明堂 이어야 맞다는데 가운데 명자가 날일(日)변이 아니고 눈목(目)으로 씌여진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고종황제가 일본을 연상하게하는 날 日자가  싫어서, 혹은 혼탁한 세상을 좀더 밝은 눈으로 보라고 등의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틀린 글이 아닌,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한자어로  밝게 볼 명(目月)이라고 합니다.

 

제자리를 잃은 경운궁

 

왕이 계시는 곳이니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의미의 하마비는 정문 밖이 아닌 문안으로 들어와 있고, 물이 흘러야 할 금천은 시멘트로 꽉 막혀있습니다. 을사조약의 현장이었던 증명전은 경운궁 터가 축소되는 와중에 궁밖에 덩그러니 혼자 서 있어 을시년스럽기조차 합니다.

 

안으로는 용이 밖으로는 학이 사는 유현문

 

석어당에서 동편의 덕흥전으로 넘어가는 담장 가운데 반월문이 있는데, 바로 유현문입니다. 꽃담 가운데 있는 유현문은 안과 밖의 모습이 서로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바깥쪽에는 유현문이라는 글귀가 진서체로 새겨져 있고 좌우에 불로초를 입에 물고 창공을 날으는 학 문양이 장식되어 있지만 안쪽으로는 같은 위치에 운룡이 새겨져 있습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편전과 침전을 감안하여 무늬를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색을 강조한 중화전이 단층인 이유

 

경운궁의 정궁인 중화전은 원래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비슷한 규모였지만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어려운 시대상황과 궁핍한 왕실재정 등의 이유로 기존의 중층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중건되었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들에 비해 그 위엄과 화려함은 확연히 떨어지는 대신 하늘로 치솟은 처마선과 화련한 단청을 통해 이를 만회하려는 흔적을 엿볼수 있습니다. 특히 단청은 청, 적, 황, 백 흑을 기본색으로 하는데 중화전은 이중 황색을 특히 강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일부러 황제가 살고 있는 곳임을 강조하고자했기 때문입니다. 위태위태했던 조선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화전과 일부러 과장된 황색의 배치가 어쩐지 더욱 서글퍼보이는 부분입니다. 

 

화재를 예방하는 주술적 의미의 '드므'

 

중화전 하월대 모서리쪽에는 4개의 드므가 있습니다. '넓적하게 생긴 큰 독' 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인 '드므'는  화마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둔 것입니다. 불을 일으키는 화마가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목조건물이라 크고 작은 화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선조들의 소박한 기대가 담긴 드므지만 요즘에는 방문객들의 쓰레기 투기를 막기 위해 물이 아닌 투명판을 뒤집어 쓰고 있어 답답하답니다.

 

고종의 체취가 묻어나는 함녕전

 

덕흥전 바로 옆에 있는 함녕전은 고종황제의 침전이었습니다. 내부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천장에는 근대식 전등들이 달려있는 신식건물이지만, 실제 그곳에서 거주했던 고종황제는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지내야했기 때문에 밤이 되면 궁궐 내의 등을 모두 켜 두어야했다고 합니다. 또한 매일 이곳저곳으로 잠자리를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비운의 황제는 결국 이곳 함녕전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일제에 의해 매수된 내시 한명이 평소에 고종이 즐기던 식혜에 독약을 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왕의 음식을 기미하는 상궁들이 먼저 죽고 고종 역시 결국 승하였습니다. 이런 고종 황제의 비운의 삶이 서려 있는곳이기 때문인지 함녕전은 다른 정전에 비해 더 엄숙한 느낌을 줍니다.  

  

단청을 사용하지 않은 석어당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가 돌아왔을 때 모든 궁궐들이 불에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월산대군이 살던 사저로 들게 되었습니다. 끝내 창덕궁을 중건하지 못한 선조는 그로부터 16년 동안 이곳에 기거하게 되는데 바로 경운궁 내 유일한 2층인 석어당입니다. 광해군에 의해 창덕궁이 재건된 후에는 빈궁으로 200여년 동안 남아있었는데 일제의 압박을 피해 이곳으로 온 고종황제는 엣 선왕이 힘든 시절 기거했던 곳인만큼 '피난의 역사를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궁궐이지만 화려한 색채의 단청을 일절 쓰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과 정겨움을 주며 지붕도 양성하고 않고 용두나 잡상 등을 비치하지 않아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다른 궁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고종황제가 기존의 궁궐을 두고 새로이 경운궁 중축에  애정을 보인 것은 임진왜란의 외침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대왕의 뜻을 본받아 다시 한번 대한제국을 일으켜보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고종황제는 조선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경운궁에서 힘들었던 생을 마감합니다. 이후 주인을 잃은 경운궁은 대한제국과 함께 일본에 의해 무차별하게 훼손되어 많은 전각이 뜯겨나가고 팔리는 비운의 궁궐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