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각기」속의 자격루가 573년 만에 그 진면목을 우리 앞에 드러냈다. 1980년대 초반에 「보루각기」 번역으로 시작된 작은 출발이 한국과학재단과 과학기술부의 연구ㆍ개발비 지원으로 이어져 그 모델이 개발되고, 이어 문화재청의 복원 설계ㆍ제작 사업으로 그 웅자가 드러났다. 이번 복원사업은 건국대학교 한국기술사연구소, 성종사를 비롯한 전통문화재 전문업체와 국립고궁박물관이 삼위일체가 되어 빚어낸 협동의 산물이다.
예로부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천체현상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時를 내려주는 일, 곧 ‘관상수시觀象授時’가 제왕의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 조선조 초기에는 경루更漏라는 물시계의 시각에 맞춰 운종가 종루鐘樓에서 통행금지와 성문을 닫는 인정人定, 1경3점에 28회, 통금해제와 성문을 여는 파루罷漏, 5경3점에 33회 큰 종을 울렸다. 성문을 여닫는 일은 국방을 위시하여 백성의 생업과 치안유지 등 정치와 국가안보에 극히 중대한 일이라 물시계를 관리하는 사람은 인정·파루 시각을 제때에 알려 주어야 했다. 『세종실록』「보루각기報漏閣記」에 “임금께서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므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고 자격궁루(自擊宮漏, ‘자격루’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우리말이다) 제작 전말을 적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자격루는 시보의 정확성과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시보인형이 주는 신비감 내지는 경외감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계를 경복궁 보루각에 설치하였으므로 보루각루報漏閣漏라 부르고, 세종은 이를 재위 16년(1434) 7월 초하루부터 오정과 인정·파루시각을 알려주는 표준시계로 반포하였다. 보루각루가 창제된 지 100여 년만인 중종31년(1536)에는 창경궁에 신보루각루를 만들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에도 종루를 설치하기 위해서다. 세종 자격루가 임진왜란 중에 소실됨에 따라 광해군은 창경궁에 흠경각을 새로 짓고, 아울러 신보루각루를 개수하여 표준시계로 삼았다.
인형시계 제작의 비밀
조선조 초기까지 우리나라에 자동물시계 제작기술이 없었는데 장영실은 어떻게 인형시계를 만들었을까? 조선 초기에는 12시법十二時法과 경점법更點法으로 이원화된 시제時制를 사용하였다. 12시는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천체시간이고 경점은 해진 뒤부터 해뜨기 전까지 밤 시간을 5등분하여 5경으로, 매경을 다시 5점으로 나누어 하룻밤을 25점으로 등분하는 일종의 생활시간이다. 장영실은 우선, 물시계로 계측한 시간을 바탕으로 12시와 경점의 시보시점(子時, 丑時 등과 1경 초점, 2점, 3점 등)마다 인형(로봇)들이 시각을 알려주는 시보(자격)장치를 구상하였다. 12시는 매시마다 인형이 종을 한 번 울림과 동시에 해당되는 시時의 이름이 적힌 12지 인형을 교대로 전시하고, 경점은 경과 점의 숫자대로 북과 징을 울리는 시보장치를 고안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물시계는 아 날로그 시스템이고, 시보장치는 디지털 시스템인 셈이어서, 이 두 가지 시스템이 접속되려면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루각 안에 층층이 다락마루를 놓아 맨 위 층에 용龍모양의 도수관이 달린 커다란 저수조播水龍壺를, 그 밑에 단계적으로 수압조절용, 수위조절용 항아리들을 놓아 일정한 유량이 계량호受水龍壺에 유입되도록 한 다음, 계량호 안(바다로 비유)에 거북모양의 부자浮子를 넣고 그 위에 시간눈금을 새긴 잣대를 꽂는 물시계를 만들었다. 계량호에 물이 유입되어 수위가 증가함에 따라 잣대가 떠오르면 관리자가 잣대에서 12시와 경점의 눈금을 읽어 시각을 알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물시계가 정밀하지 못하거나 눈금을 제때에 읽지 못하면 시간을 제시간에 시보 할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잣대가 떠오르면서 계량호 위에 세운 방목方木 안에 설치한 탄알만한 작은 구슬(12용은 12개, 경점용은 25개)이 담긴 수납기구를 밀어 올려 구슬을 떨어뜨리는 동판銅板기구를 고안하였다. 작은 구슬이 낙하하면서 발생하는 힘만으로는 인형이 종이나 북을 울릴 수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 에너지 증폭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형기구를 작동시키는 달걀만한 쇠구슬을 미리 저장하였다가 동판기구에서 떨어진 작은 구슬이 이것들을 순서대로 방출시켜주는 철환방출기구를 고안하였다. 방출장치에서 낙하한 쇠구슬들은 12시 인형과 경점 인형들이 연결된 제어기구들을 작동시켜 각각 종, 북, 징이 울리게 한다. 자격루는 물시계 시스템을 비롯하여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방목-동판), 에너지 증폭기구(철환방출기구), 12시 시보장치時機, 경점 시보장치更點機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 시스템이다. 물시계는 동아시아 전통의 3단 유입식 물시계를 발전시킨 것이며, 시보장치는 13세기 아랍의 시계기술자 앨재재리가 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이와 같이 원류가 다른 두 가지 기술의 조합으로 탄생된 자격루는 우리 풍토와 전통을 대변하는 한국성韓國性과 아울러 세계로 열린 보편성을 지닌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이것의 원리는 보루각루에 뒤이어 만든 흠경각루欽敬閣漏와 현종10년(1669)에 만든 혼천의(국보 제230호 혼천시계渾天時計)에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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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문현 건국대학교 교수(사)자격루연구회이사장 ▶사진제공 : (사)자격루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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