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되지 않으면, 잊힌다!
지난 토요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이제는 점차 희미해져가는 중고등학생 시절의 선생님들이 의식 속을 다녀가셨다. 그럴 때면 항상 반드시 필요한 사람을 적절한 타이밍에 만나는 일만큼 감사한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감사의 빚을 이만저만 진 게 아니라는 진단은 그 이후의 반성에서 온다.
그런데 학창시절을 떠올리다보니 선택적으로 생각나는 친구들의 얼굴(그들 중 일부는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의 어느 지점에 용케 생존해오다가 이런 순간에 나를 반기는 정겨운 이미지들. 이때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스쳤다. 그 내용을 밝히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당신의 학창시절 기억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인가?
![]() 어떤 각인요소가 없는 것들은 쉽게 잊게 된다. question mark ? by Leo Reynolds ![]() ![]() ![]() |
나의 경우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자주 동선이 겹쳤던 친구들부터 생각났다. 덧붙여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받은 친구들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떤 각인요소(인상적인 성격이나 신체적 매력, 이런저런 능력이나 특징 등)를 지니지 않은 친구들은 쉽사리 잊힌 것 같다. 실제로 같은 반 친구들 중 기억 속에 살아남은 친구들은 몇이 되지 않았다. 졸업식과 동시에 멀어진 친구들 대부분은 그 이후 내 의식 속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축제가 살아남는 법은 앞서 이야기한 '기억'과 '잊힘'의 공식에서 찾을 수 있다. 각 지자체가 공들여 만든 축제라면, 그것은 지역 정체성을 높이고,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며, 정주민들에겐 자부심을 키우고,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인요소'가 없는 상당수의 축제들을 보면, 우리는 그러한 기대효과가 얼마나 소원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역 축제가 생존하기 위해 이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축제'의 기본- 차별화·브랜드화를 꾀하라.
볼펜의 명확한 정의를 혼자 힘으로 규명하기 위해선, 유사한 필기구들과의 차이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다른 필기구들과의 '차이'가 명확해졌을 때, 대상의 '정체'도 분명해지는 법이다. 축제도 마찬가지다. 유사한 축제가 이름만 바뀌고, 몇몇 프로그램만 수정돼서 다시 기획된다면, 그 콘텐츠는 여러모로 '낭비'이거나 '장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 mud festival by hojusaram ![]() ![]() |
축제콘텐츠에도 일정한 유행이 있는 듯하다. 어느 지역에서 특정 축제가 수익을 창출하고 나면, 다른 지역에서 그것의 다른 버전을 기획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화상품 수출의 붐을 조성했던 '한류'가 정체된 이유를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 콘텐츠를 모방·재생산하여 현재의 붐에 편승하려고 했을 때, 장르별·콘텐츠별 컨벤션이 굳어져 '한류'는 위축되었다. 따라서 특정한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라면, 그것을 기획할 때 유행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리할 필요도 없다.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무형의 문화콘텐츠들을 굳이 수용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유행은 여기서 창조된다. 태권도나 무술에 관한 지자체의 그 많던 관심을 상기해 보라.)
그래서 자신있게 말하건대,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 알려진 기존의 흥행요소들을 끌어안으려는 노력보다도 차별화와 브랜드화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더 엄밀히 연결하여 말하면, '차별화를 통한 브랜드화'가 관건이다. 먼저는 해당 지역에 대한 내외부적 시선 속에 살아있는 '장소의 혼'을 살필 필요가 있다. 어느 지역이건 차별화된 역사와 문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행정구역상의 위치)에 일정한 정체성을 주입하는 힘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지역 축제의 차별화와 브랜드화는 시작된다.
지역 축제의 축제다움에 대하여
마케팅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위해 신발 회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소위 대박난 한 두 개의 상품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신발 회사가 있다고 하자. 지금 당장 할 일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먼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 한 두 개의 상품이 지금의 시류와 어떻게 맞아떨어졌는지를 살핀 후, 디자인과 기능 등 매력 요소를 분석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해당 상품의 매력 요소가 장기적인 회사의 비전과 공유되는 지점을 살핀 후, 그것을 통해 회사 전체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다. 유명해진 상품 한 두 개를 업그레이드해서 판매한다는 생각이 단기 승부수라면, 사람들에게 각인된 상품 이미지를 강화해 회사 이미지 전체를 강화·각인시키는 작업은 중장기적인 승부수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우리가 브랜드만 보고도 개별 상품의 기능과 퀄리티, 특정한 가치의 적용을 믿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 회사의 중장기적 승부수가 이뤄낸 성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함평의 나비축제와 김제의 지평선축제를 훌륭한 성공사례로 꼽고 싶다. 이들을 보면, 축제콘텐츠의 차별화·브랜드화를 통해 지역의 차별화·브랜드화에 도달했다고 판단된다. 먼저 함평의 경우에는 대외적으로 내세울만한 관광지도 부족했고 무형의 콘텐츠도 없었다. 단지 함평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많이 지녔을 뿐이다.(재래의 일부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낙후성을 드러내는 비극적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함평은 그러한 환경에서 생태축제의 가능성을 발견한 후, 도시민들에게 향수와 쉼을 제공하는 완성된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나비축제'가 함평이라는 공간에 혼을 불어넣은 것을 평가하면, 지역 정체성을 계승·발전시킨 측면보다도 새로운 지역 정체성을 창조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지역 브랜드화를 꾀한 것이다.
김제의 지평선축제의 경우에는 잘 보존된 지역 농경문화 유산과 다양한 유무형의 콘텐츠들을 일관된 이미지로 디자인하는 데 성공한 케이스다.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인 벽골제를 중심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시도도 성공적으로 혁신되고 있다. 사실 농경문화의 전통이 잘 보존된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 그 아이디어를 선점하여 공간 스토리텔링화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토마토 축제에서 배운다
이제 축제는 더 변별되는 지역색을 통해 글로벌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템플스테이'나 '슬로우 시티'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우도 이 같은 원칙을 지지한다. 국내에도 토마토 축제가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최근 TV CF에도 등장한 원조 토마토 축제는 스페인에서 펼쳐진다. 몇 년 전, 여름 끝자락에 그 축제를 경험하고 왔다는 친구가 들려준 마지막 말은, 조만간 반드시 다시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스페인의 작은 시골도시 부뇰(Bunol)은 그렇게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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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축제의 절정은 마을 광장의 토마토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던지고 노는 것이다. 마을 경관과 정주민과 외부 관광객들 모두를 빨갛게 물들이는 이 환상의 시공간 체험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지역의 특산물 토마토는 그렇게 전혀 차별화된 놀이의 방식으로 지역을 브랜드화했고, 토마토값 폭락에 좌절한 농민들의 이야기(토마토를 던지고 노는 이벤트의 기원은 1944년 스페인의 토마토 값이 폭락할 무렵, 농민들이 시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진 사건에 있다고 한다.)는 공간 스토리텔링으로 승화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우수 문화관광축제를 선정하고 지원하려는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김제와 함평은 그에 관한 최대 수혜자들에 속한다.) 지금부터라도 '부뇰의 신화'에 도전하기 위한 지자체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나 잠재력으로 남겨진 채, '발견'과 '개발'을 기다리는 축제 콘텐츠들은 무궁무진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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