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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문화

화성의 십자가를 누가 새겼을까

 정약용이 십자가를 새겨넣은 (?) 방화수류정   
 



“보아라! 저 성가퀴의 한쪽 면은 용연의 윗머리에 있으니.

만 떨기의 연꽃 같은 여러 봉오리는 춤추듯 나는 형세 바치고 천 줄기의 수양버들 같은 긴 시내는

그물 같은 그림의 빛을 펼치네.

홀로 뛰어나 붉은 언덕위에 세웠으니 모든 부의 아름다운 형세를 독점하였고 둥근 거울을 푸른 연못에

굽어 비치니 특별히 다른 구역의 풍경을 열었구나. 드디어 목수에게 명령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세웠다네.”

 

“참으로 아름답고 아름답도다!”

화성이 동북쪽 용머리 바위위에 우뚝 서있는 방화수류정(訪花修柳亭)을 보고 화성을 찾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감탄하며 하는 말이다.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간다는 뜻을 지닌 이 정자는 우리 문화의 극성시대인 정조시대에서도 가장 극성의

문화를 지닌 공간이다.

 

이같은 정자가 나오게 된 건 바로 정조시대 조선문화가 제일이라는 자부심 속에 중국의 문화와 조선의

문화를 융합한 시대정신 때문이었다.

 

조선의 정자와는 다른 형태인 것 같으면서도 조선의 정자이고 정자이면서도 군사지휘소인 것이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정조는 1794년 1월15일 성곽을 쌓을 곳을 돌아보다 용연 위에 있는 큰 바위 윗부분에 올라섰다.

이 자리는 팔달산을 중심으로 볼 때 왼편에 솟아 있는 바위로 팔달산 오른쪽의 거북 바위를 마주보고 있는

천하의 명당이었다.

사방이 팔달산과 선암산 사이에 버드내를 끼고 사방이 훤히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조는 방화수류정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정조는 스스로 풍수를 멀리 한다고 했지만 사실 풍수의 대가였다.

그가 이 자리를 살펴보니 광교산 정기가 그대로 용머리 바위에 뭉쳐 있는 것이었다.

성곽이 이 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이곳이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였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과 뒤로 서로 마주 응해 화성 전체를 제압하고 있는

천하 웅지(雄地)였기 때문이다.

1794년 9월4일부터 시작한 방화수류정 공사는 45일만인 10월19일 완성됐다.

45일만에 아무것도 없던 바위 위에 아름답고 찬연한 정자가 완공됐으니 당시 기술자들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방화수류정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게 바로 정자 아랫부분 벽체석연이다.

이 벽체석연은 벽돌과 석회를 발라 ‘+’자 문양의 아름다운 외벽을 만들었다.

특히 화홍문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자 문양의 교차되는 모습이 요즘의 디자인 감각으로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첨단이다.

 

 

그런데 이 ‘+’자 문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다름 아닌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천주교 신앙을 알리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만들면서 십자가 문양을

의도적으로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참 그럴듯한 이야기다.  

 

당시 정약용은 거짓으로 천주교를 배교하고 화성을 설계하면서 방화수류정에 십자가 문양을 만들었다고

널리 퍼져있다.


"정약용이 늘 신앙 간직했다는 증거”  

수원 성지를 개발한 교회사 학자 김학렬 신부(수원교구 능평본당 주임)는 "서쪽은 당시 서양의 학문

즉 천주교를 의미한다"며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서쪽 벽에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따라서 "화성에 새겨진 십자가는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자신의 정체성을 암암리에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북수동본당 나경환 주임신부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화성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대석학 정약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화성과 정약용 그리고 천주교

화성은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정약용은 특히 거중기를 고안, 화성 축조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Terrenz, J, 鄧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 1627)'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화성 축조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됐는데,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그 해 10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용은 이후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집(마현)에서 남은 생을

보냈으며 1836년 75세로 생을 마쳤다.

 

 

방화수류정은 원래 정약용의 화성시설물설치계획에는 존재하지 않은 시설물이었다.

정약용이 화성축성계획을 세운 게 사실이지만 시설물들은 모두 공사 책임자와 기술자들인 석수와 목수

등에 의해 이뤄졌다.

1792년 화성 설계 이후 정약용은 성역에 참여하지 못했다.

화성성역이 시작된 1794년부터 정약용은 연천 일대를 비롯한 전국으로 암행어사를 떠나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고 1795년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사건에 연루돼 지금의 충남 청양군인

금정으로 찰방 임무를 받아 화성이 완공될 때까지 그곳에서 관직생활을 했다.

이러한 실정이니 정약용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천주교와의 관계는 약간 무리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정약용이 배교하지 않고 방화수류정에 십자가 문양을 만들었다면 방화수류정은 진정 우리나라 최고의

천주교 성지(聖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방화수류정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바로 연무대와 동북쪽 성곽의 공사 책임자였던 경기중군 김후였다.

김후는 원래 수원 핵심 군사기지였던 독성산성 책임자로 정조로부터 매우 신뢰받는 장군이었다.

정조는 방화수류정이 군사지휘소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군인을 책임자로 맡겨 전투시설물로 부족함이

없이 하고자 했다. 방화수류정 기술자들은 수원 석수 한진욱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내수사 소속의

김차봉·최귀득이 담당했다.

 

앞서 이야기한 십자가 문양을 만든 미장이는 장용영 소속의 권옥이었다.

권옥은 미장이 편수로는 유일하게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서 높은 공로를 인정받아 1등 표창을 받았다.

방화수류정을 너무 아름답게 축조한 공을 인정받은 것 같다.
정조는 방화수류정을 자신의 왕권을 높이 보여줌과 아울러 백성과 하나 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정조는 화성 행차시 늘 군복을 입고 방화수류정에 거동했다.

방화수류정이 군사지휘소인만큼 활쏘기도 실시했다. 1797년 1월 행차시 유엽전을 세발 쐈는데 당대 최고

명사수답게 정조는 세발 모두 명중시켰다.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의 활쏘기를 통해 자신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주고자 했다.
정조는 정자 아래에서 백성들이 꽉 둘러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명령해 이중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활쏘기를 시험하도록 한 뒤 1등 1명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고 풍악을

내려 보냈다.

 

백성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활쏘기 이후 그동안 고생했던 많은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고 스스로 칠언소시(七言小詩)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했다.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돼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깊은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정조의 깊은 뜻이 담긴 방화수류정은 시대의 변화에도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유히 서 있다.

진정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대가 와 정조가 그렇게 했듯 방화수류정에서 모든 이들과 하나가 돼 기쁨의

술잔을 함께 올리길 기대한다.

 

출처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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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 화성(1796년 축조)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과연 있다면 누가 왜 그곳에 십자가를 새겨 놓았을까.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화성에 십자가가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화성을 주제로 떠난 수많은 기행문에서도 십자가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었다.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가장 먼저 화성에 인접한 수원교구 북수동성당을 찾았다. 성당에서 만난

몇몇 신자들을 붙잡고 물어 보았지만 "화성에 십자가가 있다는 이야기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신자들에게 물어 보였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 때 옆에서 한 중등부 주일학교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십자가 아주 많아요. 우리는 수없이 보았어요."

 

귀가 번쩍 띄었다. 어른들이 보지 못한 것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성당을 벗어나 5분 정도 걷자 화성 방화수류정(정찰 혹은 전망을 목적으로 세운 누각의 하나)의 화려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먼저 달려가 손가락으로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있었다.

십자가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서쪽 벽이었다.

 

"정약용이 마음 속으로는 늘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수원 성지를 개발한 교회사 학자 김학렬 신부(수원교구 능평본당 주임)는 "서쪽은 당시 서양의 학문 즉

천주교를 의미한다"며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서쪽 벽에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따라서 "화성에 새겨진 십자가는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자신의

정체성을 암암리에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북수동본당 나경환 주임신부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화성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대석학 정약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방화수류정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그 광경을

신기한 듯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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