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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통은 조선중기에 만들어진 휴대용 화기로 조선시대 화기의 발달수준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려말 혼란기를 극복한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는데,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고려말 공민왕대를 이어 화약과 화기개발에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 졌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화기의 종류는 대개 성종 5년(1474)에 편찬되어『세종실록』에 실린 총통도銃筒圖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에서 찾을 수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총통은 총통완구銃筒碗口, 장군화통將軍火筒, 일총통一銃筒, 이총통二銃筒, 삼총통三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사전장총통四箭長銃筒, 팔전총통八箭銃筒, 세총통細銃筒, 철신포鐵信砲, 신제총통新製銃筒 등 11가지인데, 총통완구는 석환石丸을 발사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화살을 발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단 철신포는 발사물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11가지 총통 중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진 신제총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 27년(1445)에 이르면 조선의 총통 성능이 크게 개선되는데, 화살의 사거리가 이전 보다 2배가량 늘어났고, 한꺼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총통의 내부 구조를 개량시켜야 가능한 것이었다.세종 27년 이전의 조선 총통의 내부구조는 자구嘴口에서부터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지다가 화약이 폭발하는 곳인 약통에서는 다시 넓어지는 무격목형총통 無激木形銃筒의 내부구조와 같은 형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세종조에는 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총통의 약통 앞부분에 격목을 끼울 수 있는 격목통을 만들고 그 앞부분에 화살을 끼우는 자嘴가 있도록 한 격목형총통激木形銃筒의 내부구조로 바뀌었다. 격목형총통의 내부구조를 갖춘 총통은 약통에서 화약이 폭발할 경우, 높은 압력이 될 때 까지는 연소가스가 새지 못하다가 갑자기 높은 압력에서 격목이 격목통에서 뛰쳐나가며 자에 있는 화살들을 발사시킴으로써, 무격목형총통보다 적은 화약으로 여러 발의 화살을 더 멀리 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총통의 뒷부분에 있는 모병冒柄에는 길이 700~800㎜의 둥근 나무柄木를 박아 손잡이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격목형의 총통은 1579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승자총통勝字銃筒에서 화약을 압축시키는 흙土隔을 사용하는 토격형土隔形의 내부구조로 바뀐다. 토격형총통의 내부구조는 자의 내경과 약통의 내경이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승자총통은 선조 8년(1575)부터 선조 11년(1578)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金墀에 의해 제작된 화기로서, 기병과 보병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화기였다.
이서李曙(선조 13년(1580)~인조 15년(1637))의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승자총통조勝字銃筒條에는
“중약선中藥線 3치, 화약 1량兩, 토격土隔 6푼으로 하여 철환 15개 또는 피령목전皮翎木箭을 발사하면 600보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승자총통의 형태는 통신筒身, 약실藥室, 손잡이柄部의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통신은 화살이나 탄환을 장전하는 부분으로, 내부는 원통이며 외형은 대竹마디로 되어 있다. 이 대마디는 8~9㎝ 간격으로 6~7개가 약실과 연결되어 있다. 또 약실은 깊이가 약12㎝ 정도로 후부의 중앙에서는 혈선 穴線이 약실을 통하게 되어 있다. 약실 뒤에는 자루가 달리는데 여기에는 나무로 된 손잡이가 끼워지기 때문에 멈치못 구멍이 뚫려 있고, 대개의 경우 이 손잡이에 그 총통의 명문이 새겨지는 것이 통례이다.
승자총통은 계속 개선되어 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으로 발전하였다. 차승자총통은 총구부위가 위로 휘어 있어, 탄환을 더욱 멀리 날아가게 할 수 있었으며, 별승자총통은 통신이 길어져 화기가 새는 것을 막아 정확성을 높였지만 총구부위가 휘어지지는 않았다. 이 승자총통의 발전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소총통小銃筒이다.
소총통은 통신자체를 길게 했을 뿐 아니라, 위로 완만하게 휘어 있어, 높은 정확성과 사거리의 확장을 모두 취할 수 있었다. 소총통은 조선 중기까지 꾸준히 진행된 조선시대 화포기술이 기병과 보병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하고 고성능의 휴대용 화기의 개발에 이르게 된 조선왕조의 화기 기술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856호 소총통은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며, 총길이 75. 5㎝, 총신길이 50. 5㎝, 약실길이 15. 4㎝, 병부길이 9. 6㎝, 구경 1. 6㎝로서, 통신에는 총구를 둘러싼 구연대口緣帶를 제외한 대마디竹節 7개를 시조施條하고, 약실은 약간 도톰하게 하다가 이어 손잡이에 이르러서는 가늘게, 그리고 끝부위는 대선帶線을 두르면서 마무리하였다.
손잡이(병부)에는 ‘萬曆十九年十月日小銃筒重五斤火藥三盞匠人金(만력19년 10월일소총통 중5근 화약3 전장인 김)’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만력 19년은 명나라 신종 19년으로 우리나라 선조 24년(1591)을 가리킨다. 그리고, 소총통의 무게는 5근이며 화약은 3전이고 화포장은 김이라 기록하여, 제작연대와 화약의 용량, 제작자 등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소총통은 우리나라 휴대용 화기 중 그 명문이 정확할 뿐 아니라 그 보존상태 또한 완전하여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 화포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문헌
-『세종실록』
- 채연석, 『한국초기화기연구』, 일지사, 198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3 - 조선초기의 정치구조, 199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디지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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