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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문화!

정읍송참봉네 초가집서 하룻밤 묵어볼까

 



호롱불 켜는 ‘조선마을’개인이 25억 들여 조성

ㆍ문명과 단절된 공간서숙박비 1만원에 옛 생활

 컴퓨터 하나로 못할 게 없는 세상에 이런 마을이 있다.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짓고 구들을 덥힌다. 호롱불을 밝히고 잠잘 때는 요강을 방 안에 둬야 한다.

 

  산골오지에서도 보기 힘든 나지막한 초가집이 25채나 된다. 돼지와 닭은 얼기설기 이어댄 막사 안 지푸라기 속에서 팔자 좋게 낮잠을 잔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에 자리잡은 ‘송참봉 조선마을’이 그렇게 생겼다. 귀동냥으로 듣던 호기심은 입구에 들어서면서 이내 가셨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누가, 왜 이런 마을을 만들었을까.

이 마을은 나랏돈 한 푼도 받지 않고 개인이 사재를 털어 꾸몄다. 엉뚱한 발상의 주인공은 송기준씨(62·일명 송참봉)였다.


 

사재를 털어 전북 정읍시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인 조선마을을 재현한 송기준씨가 한복 복장을 하고 마을 입구 안내판 옆에 서 있다.


“8세 때 서울로 올라갔는데 늘 고향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시골 모습을 보면서 죽기 전에 옛모습을 재현해 내고 싶었죠. 조상님들이 꿈속에서 ‘야 이놈아 빨리 안내려가고 뭐하냐’며 호통치기 시작했어요. 10년 전부터 자료를 모으고 돈을 모아 2006년 첫삽을 떠 3년 만에 마을을 만들었지요.”


서울에서 그는 번듯한 가구공장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고향을 향한 몸살’만 아니었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그였다. 아내와 딸을 설득했다. 그래도 조선마을에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다. 인근에 살집을 얻었다. 정읍시내 중학교로 전학온 딸은 지금도 돈키호테 같은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서울로 돌아가자며 투정을 부릴 때 송참봉의 마음은 아파진다.

 


“가족들 동의를 구했지만 어려움은 그때부터였죠. 마을부지 선정부터 쉽지가 않았어요. 송전탑이나 전봇대, 가옥 등 현대 시설물이 전혀 보이지 않아야 했죠. 옛날 이불과 식기 등을 구하기 위해 시골마을을 굽이 닳도록 돌아다녔어요.”

마을 촌로들은 묵고 묵은 이불을 내놓으면서도 “미친 사람이 나타났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돈으로 편히 먹고 살지 고생을 사서 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시골 빈집 56채가 헐렸다. 구들장과 주춧돌, 토방석 등 옛날 초가집 재료를 빼와야 옛날집 재현이 가능했다. 집을 지은이들은 목수가 아니었다. 송참봉의 깊은 뜻을 이해한 동네 할아버지들이 나서 상랑을 맞췄다. 산채와 주막, 서당, 뒷간, 축사 등이 1만5000㎡에 모습을 갖췄다. 마을 이름은 1894년 동학혁명 시점에 맞춰 ‘송참봉 조선마을(063-532-0054)’로 지었다. 25억원을 쏟아부었다.


이곳에서 옛 생활을 체험하려면 숙박비 1만원을 내야한다. 초등생은 절반이고 초등생 이하는 무료다. ‘문명과의 단절’을 감수해야 하는 시설이 돈이 될 리 없다. 송참봉은 올 초 문을 연 뒤 매달 2500여만원을 인건비와 운영비로 쏟아붓고 있다.

송참봉은 많이 지쳐 보였다. 선조들의 마을을 지켜내는 일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탓이다. 아직까지 벌어놓은 재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힘겨움을 느낀다.


“후회할 때도 있지만 마을을 쳐다보면 힘이 불끈 솟아요. 전북에 가면 송참봉 마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있어요. 언젠가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