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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한국 초상화, 영혼을 그리다

 초상(肖像), 영원을 그리다

 


 화면 밖으로 나와 말을 걸어올 듯 생생하게 그려진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만나 대화해보는 일을 추천하고 싶다. ‘초상(肖像), 영원을 그리다’

 ‘영정(影幀)’, 이는 형상을 뜻하는 ‘영(影)’과 그림 족자를 의미하는 ‘정(幀)’을 합한 말로, 영정이란 결국 형상을 그려 족자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영(影), 진(眞), 진영(眞影), 영자(影子), 영상(影像), 영첩자(影帖子), 상(像), 화상(畵像), 초상(肖像) 등으로, 왕의 초상인 경우, 어진(御眞), 어용(御容), 진용(眞容), 성용(聖容), 왕영(王影) 등으로 각각 부른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용어들을 초상화로 통일하여 부르는 경향이 있다. 쉽게 정리하면, 초상화란 인물의 전신이나 상반신을 주인공과 아주 닮게 극히 세밀하게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전신화(傳神畵)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초상화는 그 양이 적지만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우리나라 전통 회화 중에서도 매우 수준 높은 분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사실 초상화는 예술품이기 이전에 조상을 공경하고 추모하며 조상의 음덕과 보살핌을 귀히 받들어오던 숭모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발전해 왔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정신으로 대상 인물들을 실제 모습과 똑같이 닮게 그리기 위해 진력하였으며, 단지 외모의 닮음만이 아니라 ‘정신의 전달(傳神, 전신)’과 ‘마음의 닮음(寫心, 사심)’까지 추구했다.

 흔히 동양의 초상화는 유럽의 초상화에 비해 인간적 풍모보다는 격식에 치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중국 일본의 초상화와는 달리, 주어진 형식적 규범을 존중하면서도 인간적 면모와 기품을 표현하는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어 한국미술사에서도 대표적인 장르로 손꼽히고 있다.

 몸과 얼굴을 약간 옆으로 튼 모습을 그려 자연스레 입체성을 살리고, 섬세한 붓질로 살결을 따라 비단의 뒷면에서 색을 올린 배채법을 써서 은은한 피부색을 나타내는 등 인물의 얼굴을 자연스레 그려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그렸는데, 정치적·사회적 특성에 따라 많이 그렸거나 적게 그렸다. 그리고 초상화는 대부분 전문 화사(畵師)가 그렸다.

 초상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회 상류층에 속하는 계층으로, 자애로움과 당당함 및 위엄, 그리고 학덕의 조화를 잘 드러낸 모습이다.

 초상화는 임금의 얼굴을 그린 어진(御眞)에서부터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얼굴을 그린 공신상, 덕 높던 스님들의 모습을 그린 고승진영(高僧眞影, 僧像), 기로상(耆老像), 일반 사대부상, 여인상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상은 문관이나 무관인 관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관복상(官服像)과 평복(平服)(또는 야복상(野服像))으로 구별된다. 주인공의 형상과 정신을 비교적 잘 전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사대부상은 다른 초상화에 비하여 그 수도 많고 수준도 높다.

 관복상, 즉 공신상(功臣像)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그려진데 비해, 평복상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상인물과의 접촉을 빈번하게 하면서 그렸기 때문에 완만한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림의 수준이 낮은 것도 있다. 사대부상은 서원(書院), 영당(影堂), 사묘(祠廟) 등의 발달과 유행으로 많이 그려졌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초상화는 4백여 점이 되며,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는 김진여, 김홍도, 안건영, 이광좌, 이기, 이태, 이명기, 이한철, 임희수, 장경주, 조중묵, 진재해, 채용신 등이다.

 

 국보로 태어난 초상화


 익재영정(국보 제110호)은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년-1367년)의 초상화이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 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마저 준다.

 이 그림은 1319년(충숙왕 6년)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나머지 2점의 익재영정은 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 경북 문화재자료 제90호, 가산사 소장 익재영정은 전남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선생의 영정(국보 제110호)과 형식이 같은데, 조선시대에 옮겨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약간 오른쪽으로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전신좌상으로, 가로 96㎝, 세로 165㎝의 크기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윗부분에 그림의 제작에 관한 내용과 그림을 찬하는 글을 적고 오른편에 몇 권의 책이 놓인 책상을 배치하여 재미있는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의자의 손잡이는 앞으로, 책이 있는 책상은 인물의 뒤로 자연스럽게 두어 인물의 자태가 안정감이 있다. 얼굴을 그린 선은 부분적으로 성격을 달리하여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이모본이지만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표현 양식이 원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90호는 왼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소매가 넓고 비단으로 테두리를 두른 심의(深衣)를 입고 있으며, 손은 맞잡아 소매 속에 넣고 있다.

 작자는 알 수 없으며, 전하는 바로는 1688년(숙종 13년)에 제작하여 구강서원에 보관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그려놓은 국립중앙박물관본이나 가산서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산사 소장 익재영정은 1319년(충숙왕 6년) 선생이 왕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진감여가 그렸던 원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18세기 후반에 옮겨 그린 것이다.

 왼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의자 뒤로 책과 향로, 가야금이 놓여진 탁자를 배치해 놓았다. 눈동자, 수염, 입술은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진본을 옮겨 그린 것이지만 얼굴의 표현, 옷주름의 처리, 의자나 사물 등의 표현이 원본과 거의 비슷하다.

 

 

 회헌영정(국보 제111호)은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년-1306년)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했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2년 후인 1318년(고려 충숙왕 5년)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어진의 매력


 조선시대의 어진은 궁중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다. 실례로 영조와 철종의 어진이 대표적이다.

 익선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허리에 옥대를 찬 영조대왕의 어진은 국왕으로서의 기품과 당당함이 수염 하나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진은 궁중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다. 실례로, 영조대왕(1694년-1776년)공신을 녹훈(錄勳)할 때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가문에 내림으로써 대대손손 기억하게 하려 하였기에 많은 공신들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조선영조왕이금상(보물 제932호)은 조선시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년-1776년)의 초상화이다. 영조는 심각한 당파싸움에 대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스스로 학문을 즐겨 문예 부흥기를 이루었다.

 이 그림은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로 68㎝, 세로 110㎝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는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있고 두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높은 콧등과 코 가장자리, 입의 양끝은 조각처럼 직선적으로 표현됐다. 가슴에 있는 각대 역시 위로 올라가 있고, 옷의 외곽선을 따로 긋지 않는 등 조선 후기의 초상화 양식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1744년(영조 20년)에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일류급 초상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비록 원본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원본을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왕의 영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영조는 재세시 7차례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모두 13점). 지금은 20세때(1714년)의 초상화(정기군초상(庭祁君肖像), 진재해 등이 그림)와, 50세때 초상화를 1900년에 채용신과 조석진이 함께 이모(移模)한 초상화(영조대왕어진)만 남아 있으며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다.

 50세때(영조 20년, 1744년) 그린 초상화는 장경주, 김두량 등이 제작했던 것으로 한국전쟁때 소실됐다.

 20세의 홍안 청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연잉군초상(보물 제1491호, 183×87㎝)은 불행하게도 한국전쟁때 한쪽이 불탄 반소품(半燒品)이다. 다행히도 상용(像容)쪽은 많이 남아 있다. 

 연잉군초상은 화면의 좌측 상단에 ‘初封延仍君古號養性軒(초봉연잉군고호양성헌)’이라 적혀있어 이 본이 영조가 임금이 되기 이전에 제작된 연잉군 시절 도사본(圖寫本)임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 고궁박물관 소장의 철종어진과 익종어진 등 극소수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므로 이 상은 영조가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라 할지라도 어진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또한 이 상은 보물 589호로 지정된 ‘강현상’과 함께 18세기 초기 정장 관복 형식의 초상화의 형식을 대표하는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조선태조어진(보물 제931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1점 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했다.

 1872년(고종 9년)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은 모두 25점이나 그려졌는데, 면복본(冕服本), 정건본(幀巾本), 익선관본(翼善冠本), 곤복본(袞服本), 황룡포본(黃龍袍本), 입자본(笠子本), 마좌본(馬坐本) 등이다. 물론 모두 영전(影殿)이나 진전봉안용(進展奉安用)이다.

 이들 태조어진은 문소전(文昭殿), 선원전(璿源殿),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영숭전(永崇殿), 목청전(穆淸殿), 영희전(永禧殿), 남별전(南別殿) 등에 봉안됐다.

 태조어진 봉안에 참여한 화가를 보면 윤상익, 조세걸, 이재관, 조중묵, 조석진, 채용신 등이 있다.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어진은 1872년에 조중묵이 모사한 익선관본이다. 물론 현재 유일의 태조어진이다.

 철종어진(보물 제1492호, 202×93㎝)은 임금이 구군복(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철종어진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이 어진이 1861년(철종 12년)에 도사(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여31세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헌인영효대왕)’이라고 적혀 있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어진도사사실’에 의하면, 이한철과 조중묵이 주관 화사를 맡았고, 김하종, 박시준, 이형록, 백영배, 백은배, 유숙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 여에 걸쳐 강사포본(絳紗袍本)과 군복본(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 군복본만 현전한다.

 창덕궁 구선원전(보물 제817호)은 왕들의 초상을 모신 곳이었다.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한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1656년(효종 7년)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1695년(숙종 21년)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함춘원지(사적 제237호)도 어진과 관련된다. 함춘원은 1484년(성종 15년)에 창경궁을 짓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그곳에 관계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1493년(성종 24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됐다.

 1764년(영조 40년)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으며, 1785년(정조 9년)에 이 일대를 정비했다. 1899년(광무 3년)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경모궁도 경모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1900년(광무 4년) 경모궁 터에 6성조, 즉 태조, 세조, 성종, 숙종, 영조, 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그 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선비들의 초상화


 초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공신초상과 사대부초상이다. 공신 초상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린 것이며, 성리학이 통치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각 사묘와 영당, 서원에 모시기 위해 그려진 것이 사대부 초상이다. 사대부란 문관관료로서 4품 이상을 대부(大夫), 5품 이하를 사(士)라 했지만, 문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공신을 녹훈(錄勳)할 때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가문에 내림으로써 대대손손 기억하게 하려 하였기에 많은 공신들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이상길(1556년-1637년)을 그린 초상화(보물 제792호)는 가로 93㎝, 세로 185㎝의 크기이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다. 머리에는 낮은 사모를 쓰고 붉은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아 보이지 않는다.

 옷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속옷과 양쪽 어깨의 기울기를 달리해 안정되어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조선 중기 초상화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얼굴에 있어 윤곽선의 농도를 다르게 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수법으로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모본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원본을 따라 충실하게 그렸고, 필체가 섬세하고 보관 상태도 양호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박문수(1691년-1756년)초상화(보물 제1189호)는 조선 영조 때 문신인 박문수를 그린 초상화 2점이다. 박문수는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종가에 전해오는 2점의 영정은 크기가 다른데, 1점은 가로 100㎝, 세로 165.3㎝이고 다른 1점은 가로 45.3㎝, 세로 59.9㎝이다.

 2점 가운데 크기가 큰 초상화는 38세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공신상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두 손은 맞잡고 소매속에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발은 받침대 위에 ‘팔(八)’자로 얹어 놓았다.

 초록색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두 마리 학과 구름무늬를 수놓은 흉배를 하고 있으며 금장식의 각대를 두르고 있다. 단아한 얼굴에 수염이 그리 많지 않으며 음영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준 높은 화원의 솜씨인 듯하다.

 다른 1점은 붉은색의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화법이 정교한 반신상의 그림이다. 2점의 초상화 모두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질적 수준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채제공(1720년-1799년) 초상 일괄(보물 제1477호)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채제공 초상 일괄(시복본,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고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특히 영정을 그린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이 당대의 최고로 꼽힘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 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화자(畵者)는 이명기(李命基)’로 나오며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됐다.

 금관조복본(1784년 작)은 65세 때 초상으로 왼편에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1743- ?)이 썼다.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장식적인 금관조복을 금박,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누가 그렸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으로, 본래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 배치는 역시 이명기의 초상화법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조씨(趙氏)삼형제초상(보물 제1478호)는 조계(1740년-1813년), 조두(1753년-1810년), 조강(1755년-1811년) 삼형제를 하나의 화폭 안에 그린 작품이다.

 

 좌안8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서, 맏형을 중심으로 하여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초상화 대부분이 화폭 안에 대상 인물 일인(一人)만을 그려 넣는데 반해 특이한 화면 구성을 보인다.

 세 형제 모두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時服)을 입고 있다. 맏형은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 아우는 각대를 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형식의 집단화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유숙초상 및 관련 교지(보물 제1479호)는 1613년(광해군 5년)에 형난공신(亨難功臣)으로 책록되었던 유숙의 초상이 종이 초본 4점과 함께 남아 있으며, 유숙이 형난공신이었음을 알려주는 처(妻) 채씨에게 내려진 교지 및 유숙의 홍패, 백패 등 관련 교지 3점을 말한다.

 유숙상은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 좌상으로서 중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주며, 형난공신 책록을 계기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모의 높이는 상당히 낮으며, 사모의 뿔은 운문이 담묵으로 처리되어 있다. 가슴에는 백한문양의 흉배가 보이며, 삽금대(揷金帶)를 두르고 있어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유숙의 품계가 3품이었음을 말해준다.

 안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빛을 바탕으로 하여 이목구비를 약간 짙은 색 선으로 규정했으며, 중기공신상에서 익히 보듯이 양 미간에 몇 개의 세로 주름선을 집어넣어 생각에 잠긴 듯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다.

 눈동자의 동공주위를 니금색(泥金色)으로 칠한 것이 주목된다. 아래 눈꺼풀 밑에는 약간의 주름선을 자연스레 집어넣었으며 뺨에는 약간 홍기를 띠우고 있다. 입술선은 확실히 외곽을 규정하고 짙지 않은 붉은 색으로 그 안을 채워 넣었다.

 심환지(1730년-1802년)초상(보물 제1480호)은 양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구분면의 전신상으로 바닥에는 화문석 자리가 깔려있다.

 조선후기 초상화의 특징인 사실성과 장식성의 조화를 잘 보여주며 기법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상의 요체를 포착한 얼굴 묘사로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질감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기물의 표현으로 박진감 넘치는 시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단령을 입고 가슴에는 쌍학흉배가 붙어있으며 서대를 허리에 두르고 있다. 비교적 낮은 족좌대와 원근법으로 처리된 화문석, 의복의 두드러진 명암법 등에서 19세기 초반의 사실적인 초상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생동감 있는 안면의 사실적 묘사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복과 기물의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고 심환지의 높은 지위를 고려할 때, 이 초상은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난 초상 화가였던 이명기나 그에 버금가는 정도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환지가 영의정이 된 1800년 이후의 작품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김유초상(보물 제1481호)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관료인 김유(1653년-1719년)의 초상으로 표제를 통해 1716년(숙종 42년) 64세 때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1710년대의 단령본(團領本) 전신 교의(交椅) 좌상으로는 많지 않은 예일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기량과 예술적인 수준도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더구나 18세기 이후 가장 널리 유행한 조선후기 초상화의 가장 전형적인 양식을 이 김유 상만큼 이른 시기에 이처럼 직접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많지 않다.

 교의자에 걸친 장식 모피가 원형의 표범 무늬가 아니라 긴 줄무늬의 호피인 점, 또한 교의자에 걸친 호랑이 가죽의 호랑이 얼굴 부분을 의답(椅踏) 위의 중앙에 살짝 내비친 뒤 양 발을 의답의 좌우 옆면으로 크게 드러내 강조한 점, 그리고 교의자의 손잡이가 심하게 구부러지고 입체감을 전혀 표현하지 않은 점 등은 18세기 초반의 초상화들에서 전형적으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시방(1594년-1660년, 보물 제1482호)초상은 현재 대전의 후손가에 6점이 전하고 있다. 이 중 17세기 공신 도상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관복본 전신상에 대해서만 보물 제1482호로 지정됐다.

 이채초상(보물 제1483호)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이채(1745년-1820년)의 초상이다.

 19세기 초반의 가장 대표적인 유학자 상으로서 눈빛이 형형한 얼굴의 정교한 묘사는 조선후기 초상화가 도달했던 높은 수준의 사실성을 대표해준다.

 눈부시게 수려한 용모를 실로 뛰어난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 상부에 이한진과 유한지 등 당대 명필들의 미려한 찬문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조선 후기 연거복(燕居服) 초상화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

 남구만(1629년-1711년)초상(보물 제1484호)은 관복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 얼굴이 정면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사모에 녹포단령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다. 이 초상 가운데 가장 특이한 요소는 얼굴 표현에서 나타난다.

 정면으로 그려진 얼굴은 윤곽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깝게 보이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드러내는 수법을 사용했다.

 정면상이란 점에서도 새로우며 얼굴의 입체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선묘의 효과를 극소화하고 선염 처리를 활용한 점도 이채롭다. 이 초상은 18세기 초 새로운 영정 유형과 기법의 대두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가 된다.

 화면 좌상단에는 대사성 최창대가 쓴 긴 찬문이 보인다. 최창대가 대사성으로 있었던 것은 1711년뿐이었고 이후에는 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대사성이란 관직명으로 인해 이 초상이 171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이오(1788∼?. 강세황의 손자)초상(보물 제1485호)은 오사모를 쓰고 분홍 시복을 입은 정면 반신상으로 배경은 없다.

 화가는 초상화로 이름이 높았던 이재관이며 김정희가 이 초상을 보고 찬을 짓고 직접 적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법을 일부 반영하면서도 이전의 전통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는 19세기 초상화의 수작이다.

 분홍색 시복은 비수(肥瘦)가 있는 필선으로 윤곽과 의습을 묘사하였는데 필치가 활달하며, 분홍색 농담을 달리하여 명암효과를 가미했다.

 푸른색 각대에는 가운데 금박 장식이 있는데 일부는 탈락됐다. 얼굴, 수염, 복식 등으로 미루어 40대 정도의 중년기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족자 형태인 작품의 상태는 양호하며, 화면 전체에는 아교가 포수되어 반짝거린다.

 이광사(1705년-1777년)초상(보물 제1486호)은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필묘와 은근한 요철감을 표현하는 수법으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품격 있고 깊은 전신(傳神)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수준이 높은 역작이다.

 또한 신한평(申漢枰)이 초상으로 유명하였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광사는 원교체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이광사 초상 화면 우상단의 글귀를 통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제작 시기, 화가 등 내력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1775년에 이광사 말년의 모습을 신윤복의 아버지로 유명한 화원화가 신한평이 그린 것임이 확인된다.

 서직수(1735년-?)초상(보물 제1487호)은 화면의 오른 편 상단에는 서직수의 자찬이 있어 서직수 62세인 1796년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린 합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서직수상은 동파관에 도포를 입고 흑색 광다회를 두르고, 버선발로 서 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입상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좌상인데 반해 입상(그 것도 실내장면)일 뿐더러, 당대 최고화가들의 합작이라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매우 뛰어난 형태 묘사와 투시법, 명암법을 구사하면서도 높은 품격을 보여주어 정조대 초상화의 백미로 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득경(1629년-1710년)초상(보물 제1488호)의 우측 상단에는 이서가 지은 찬을 윤두서가 썼으며, 왼쪽 상단에 다시 이서의 찬이 적혀 있다. 윤두서가 1710년(숙종 36년) 11월에 추화(追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이나 의복의 묘사는 다소 과장과 형식화가 엿보이고 있어서 사실적 묘사로서의 초상화의 특징과 유형화된 표현을 위주로 하는 일반 인물화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태응의 ‘청죽화사(靑竹畵史)’에 이 초상에 대하여 적고 있다. 친구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리니 심득경 가족들이 이를 보고 모두 울었다고 전한다.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인 윤두서가 그린 초상화로서 의미가 크며 회화성도 높은 중요한 작품이다.

 박유명(1582년-1640년)초상(보물 제1489호)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성윤초상(보물 제1490호)은 이성윤(1570년-1620년)이 1613년(광해군 5년) 위성공신 2등에 녹훈될 때 하사받은 녹훈공신상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는 초상화이다.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모두 삭훈되고 공신녹권과 공신도상도 국가에서 수거하여 소각했다.

 그래서 광해군 때의 공신상은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그 실상이 미상인 채 거의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현재 후손가에는 위성공신 녹권과 이 초상화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금은이 매우 화려하게 사용되고 석채 진채도 매우 곱고 선명하다. 묘사도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여 17세기 초반의 공신상 중에서도 매우 양질의 상품에 속하는 초상화라고 생각된다.

 오재순(1727년-1792년)초상(보물 제1493호)은 비록 오재순 사후에 쓰여진 것이지만 당시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원 이명기가 오재순의 나이 65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의 경우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화법을 적용하였지만 이전에 발달되었던 선묘 위주의 해맑은 얼굴 표현의 전통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사실성과 이상미가 어우러지는 전신(傳神)의 지극한 경지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 후기 초상화이 높은 수준을 대변해주는 수작이다.

 이전의 산뜻한 선염법을 사용하던 것과는 달리 세세한 붓질의 반복을 통해 얼굴의 형태와 명암을 자세히 표현했다.

 옷주름 역시 강한 명암 대비 효과를 구사하여 입체감 있게 그렸으며, 운보문단(雲寶紋緞)의 문양도 옷주름의 변화를 고려하여 굴곡을 따라 처리하고 있다. 쌍학흉배의 경우도 자수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

 황현초상 및 사진(보물 제1494호)은 대한제국기 전후 최고의 초상화가로 일컬어지는 석지 채용신(1850년-1941년)이 그린 대표적인 문인이자 우국지사인 황현(1855년-1910년)의 초상화이다.

 황현상은 양식사적으로도 대한제국기 전후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와 특징적인 모습을 매우 종합적으로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수준도 이 시기 초상화의 백미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한 다음해인 1911년 5월에 일찍이 황현이 1909년 천연당사진관에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사후에 사진을 보고 추사한 것이지만,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매우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도상은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든 채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은 부좌상(趺坐像)이다.

 사진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초상화는 심의(深衣)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쓴 뒤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약간 바뀌어 있다.

 윤증(1629년-1714년)초상 일괄(보물 제1495호)도 관심을 끈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 ‘영당기적’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변량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 사례를 기록했다.

 그 내용은 제작 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명기가 제작한 현전하는 초상화 2점은 장경주 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과 이명기의 개성적 화풍으로 그린 입체 표현이 선명한 신법의 측면상이다.  정면과 측면의 흉상 2점은 화면에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추정된다. 측면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이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같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윤급초상(보물 제1496호)은 조선후기 문신인 윤급(1697년-1770년)의 영정으로 사모와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표피를 깐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으로 앉은 뒤 공수(拱手)하고 있는 전신상이다.

 쌍학흉배와 서대(犀帶)를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윤급이 판의금부사를 지내 1품에 오른 1762년(영조 38년)의 66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변상벽(卞相璧)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和齋畵幀)’의 기록이 인용되고 있어, 동 초상이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였던 변상벽이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얼굴의 사마귀와 검버섯, 붉은 홍기(紅氣)까지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이며 족자표장도 18세기 후반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성을 더해준다.

 김시습(1435년-1493년)초상(보물 제1497호)은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얼굴과 의복은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총기가 생생한 눈이 백미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라는 인물사적 가치 위에 조선시대 야복초상화의 가작이란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조선후기 문인 초상(보물 제1498호)은 분홍색 시복을 입고 화문석에 앉아있는 좌안팔분면 좌상으로, 얼굴은 약간 화면의 좌측으로 치우쳤고 눈을 아래로 깔고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의복은 담묵의 주름선 언저리에 명암이 가해져 있으며, 가슴 부분에서 살짝 아래로 휘어져 복부의 입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허리에는 삽대를 차고 있는데 가운데 부분을 금박으로 처리했다. 인물이 방석 위에 표범 가죽을 깔고 앉아 있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그림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섬세하고 정교할 뿐 아니라 인물의 품성까지 잘 드러내주는 수작이다. 18세기 후반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줌과 아울러 원래 표장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하응초상 일괄(보물 제1499호, 초상 6점, 함 5점, 향낭 8점, 표제 3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년-1898년)의 장년기와 노년기 전신 초상 6점으로 5점은 서울역사박물관, 1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 5점은 모두 조선말기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인 이한철이 그렸다.

 먼저 그린 3점(흑단령포본, 금관조복본, 와룡관학창의본)은 1863년(고종 원년)의 44세 때 그린 초본을 토대로 하여 50세가 되던 1869년(고종 7년)에 이모한 것이고 뒤에 그린 2점(흑건청포본, 복건심의본)은 환갑을 맞은 1880년(고종 17)의 61세 주갑상(周甲像, 환갑상)이다.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한철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하응 초상은 금관조복본으로 그림의 크기나 기본적인 도상, 재료, 기법, 화풍, 풍격, 수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63년 이한철, 유숙 작의 ‘금관조복본’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대략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작가들에 의해 그려진 복본 또는 별본으로 추정된다.

 대원군 초상화(동아대학교 소장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은 몸을 약간 왼쪽으로 튼 채 손으로 자주색 함을 받들고 선 대원군 이하응의 전신상이다.

 이 작품이 가장 늦게 제작된 대원군의 노년상이며, 복식 또한 우리나라의 조복(朝服) 형태가 아닌 이국적인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인물의 안면은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살색으로 채색하고, 여러 개의 가는 선을 겹쳐 인물의 윤곽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면서 자연스런 음영을 만들었다.

 몸은 얼굴에 비해 매우 간단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 비례로 보아 입상인지 좌상인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의복의 옷주름도 도식적이며 붉은 색 술이 달린 검은 모자도 청나라의 것에 가깝다. 

 아울러 이 작품이 제작될 당시에는 서양화법, 명암법 등 새로운 화풍이 알 려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을 따르고 있어 주목되며, 대원군 초상이 함부로 모사될 수 있는 성격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 할 때, 본 초상화는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작품이다.

 의복 등에서 이국적인 풍모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화면 우측에 ‘대원군지초상(大院君之肖像)’이란 묵서가 적혀 있어 대원군의 초상임을 밝히고 있다.

 복식 등으로 미루어 이 초상화는 대원군이 1882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청국으로 연행되어 바오딩(保定)에서 3년간 유폐된 생활을 겪었을 당시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김이안(1722년-1791년)초상(보물 제1500호)은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반신상이 1점, 이화여대박물관에 전신입상이 1점이 전하고 있는데, 두 박물관 소장의 초상은 동일한 상호와 복식을 하고 있다.

 연세대박물관 소장 김이안 초상(반신상)은 정교하면서도 이상화된 안면 묘사로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한 수작이다. 머리에 쓴 복건이 자주색을 띄는 점이 이채롭다.

 반면 이화여대박물관 소장본은 조선시대 초상화 중 전신입상의 희귀한 예이나 연세대박물관 소장본에 비해 화풍에 있어 경직된 면모를 보여준다. 두 점의 김이안 초상 중 연세대박물관 소장본만을 보물로 지정됐다.

 이덕성(1655년-1704년) 초상 및 관련 자료 일괄(보물 제1501호, 초상 1점, 고문서 4종 121점, 전적 5건)도 좋은 작품이다.

 이덕성 초상은 높은 오사모에 녹색 단령을 입고 좌안칠분면의 자세로 교의에 앉은 모습이며 배경은 없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됐다.

 단령은 비교적 가늘고 짙지 않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는 밝은 녹색을 바탕으로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했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 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하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중요한 사례이다.

 전 윤효전 초상(보물 제1502호)은 1605년 문과에 급제하고 1612년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삭훈된 윤효전(1563년-1619년)의 초상이다.

 바닥에 화려한 채전(彩氈)을 깐 뒤, 단령과 사모를 착용하고 교의(交椅)에 반우향(半右向)으로 앉아서 공수하고 있는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 형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공작흉배에다 서대를 착용하고 있어 익사공신 책록시의 윤효전 품계와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1629년 아들 윤휴의 상소로 복관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한 도상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도상이나 화풍, 미감 등이 현재 충북 괴산의 종가에 전하는 보물 제566호 유근(1549년-1627년) 71세 상으로 알려진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임장(1568년-1619년)초상(보물 제1503호)은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단령을 입고 공수한 뒤 의자에 앉아 좌안7분면을 취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을 깔고 두 발은 돗자리를 깐 목제 의답(椅踏) 위에 팔자형으로 벌리고 있다.

 이 초상화는 왼쪽 눈꼬리를 위로 치켜 올려 두 눈의 형상을 차이 나게 묘사한 점, 숱은 적지만 때로는 짧게 때로는 약간 길게 올의 방향을 달리하여 수염의 성질을 잘 살린 표현법 등에서 화가가 인물을 앞에 두고 실사한 느낌이 강하다.

 ‘인조실록’(인조 원년 9월 2일) 및 ‘성시헌익사공신교서(成時憲翼社功臣敎書)’의 내용을 통해 임장이 익사공신 3등에 녹훈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기의 화풍과 도상을 고려할 때 익사공신 책록 시 받은 공신상으로 추정된다.

 유언호(1730년-1796년)초상(보물 제1504호) 오사모에 흉배가 딸린 단령포 차림의 관복입상 그림으로, 유복이나 평상복 차림의 입상은 없지 않으나 관복정장의 입상 초상화로는 첫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입상이면서 왼팔 소매 끝을 쥔 오른손이 살짝 보이도록 그린 것은 이명기 작 ‘강세황 71세상’과 비슷하다. 그림 왼편의 기록으로, 1787년에 도화선 화원 이명기가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 윗부분에 정조의 어평(御平)을 써넣고 있는 점 등에서 유언호가 이 당시 우의정에 오른 기념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명기의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안면 표현의 입체감이 선명하고 옷주름의 음영이 뚜렷하다. 소맷자락 아래로 짙은 농묵표현과 관복의 밑으로 화문석에 떨어진 그림자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또, ‘얼굴과 몸의 길이와 폭은 원래 신장과 비교할 때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容體長闊 視元身減一半)’란 글을 기술하고 있어, 유언호의 실제 키와 그림의 키 배율을 계산하여 그린 작품으로 주목된다.

 허목(1595년-1682년)초상(보물 제1509호)은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을 입고 서대를 착용한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1794년(정조 18년) 정조가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은거당(恩居堂, 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정의 오른쪽에는 채제공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허목 초상은 생시진상은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최익현초상(보물 제1510호)은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인 최익현(1833년-1906년)의 초상화로, 우측 상하단의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심의를 입고 털모자를 쓴 모습인데 심의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털모자의 모관(毛冠)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문조선시대의 문신인 이숭원(1428년-1491년)의 초상화(경북 유형문화재 제69호)는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 3등을 받고 연원군에 봉해졌을 때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제작된 공신도로 보인다.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으로, 가로 100㎝, 세로 200㎝의 크기이다. 머리에 쓴 사모가 양 옆으로 길게 수평을 이루고 있는 형태와 관복의 바탕 색이 연붉은 점, 얼굴의 표현과 옷주름의 처리, 발 받침대의 모양에서 조선 전기의 초상화 기법이 엿보인다.

  우리나라 초상화의 대부분이 두 손을 옷소매 안에 넣은 공수자세인데 비해 이 상에서는 손이 밖으로 나와 있다.

 화면 오른쪽에 기록해 놓은 작품의 내력과 주인공에 대한 글은 후대에 써넣은 것으로 보이고, 화폭의 배경에 있는 포도덩굴 역시 후대에 그려넣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긴 하지만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조선 전기 공신도상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이 상은 중종을 비롯한 많은 공신들의 상을 잘 그렸던 학포 이상좌가 그린 것으로 전한다.

 화폭 뒤쪽의 포도넝쿨은 후대에 그려 넣은 것으로서 초상화의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지만, 이 점을 제외하고는 현존초상화 가운데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방촌영정(전북 유형문화재 제129호)은 화산서원에 모셔둔 방촌 황희(1363년-1452년)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온 것을 1844년(헌종 10년)에 옮겨 그린 것으로, 선생의 온유한 인품과는 다르게 오히려 엄숙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로 54㎝, 세로 80㎝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했으며, 원본 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어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다.

 상주 옥동서원의 초상화는 선생이 62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이를 옮겨 그린 그림이 5점 정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고, 노덕서원과 파주영당에 모사본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에도 이 화산서원의 초상화가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여하가 이 초상화를 보고 선생의 인품에 대해 적어 놓은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평소 집에 있을 때는 그저 온화하여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수염을 잡아당기며 안아달라고 조르거나 먹을 것을 내라고 조르기를 마치 제 부모에게 하듯 해도 내버려두지만 관복 차림에 홀을 꽂고 묘당에 나서면 조정이 숙연했다.

 비유컨대, 용이 못 속에 숨어 있을 때에는 자라나 도마뱀 따위의 업신여김을 받지만 한번 변화하면 비바람과 벼락을 일으켜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과 같다’


조선조 최고의 신필화가 채용신


 조선조 최고의 신필(神筆)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 아명 東根, 자는 大有, 호는 石芝)은 지난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무관 가문의 장남으로 출생했지만 선대가 약 3백년 동안 전북에서 살아온 인물로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그는 22세에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부터 화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50세 전후에 제작한 고종황제 어진으로 왕의 총애를 입었지만 한일합방 후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향리인 전주 장암리(현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로 낙향, 익산, 변산, 고부, 남원, 나주 등지를 돌며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본격적으로 그리는 등 독립운동의 전개와 그 기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특히 채용신은 고종의 어진을 포함, 이하응, 최익현, 황현, 최치원, 김영상, 전우 등 초상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그리고 ‘운낭자27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 (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을 남기는 등 금세기 한국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 그는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80여점의 초상화를 남긴 초상 전문 화가였다. 조선조 말 근대정신과 당시 사회상, 게다가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초상화를 제작한 유일한 화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석지 채용신은 직업 화가가 아니라 무과에 급제해 종2품까지 지낸 무관이었다. 특히 자신만의 독특한 극세필 필법인 ‘석지필법’을 창안해 사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작품을 제작했다.

 조선시대 전통 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 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하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채석지 필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이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제작은 중인 출신의 도화서 화원들의 차지였음도 불구, 관례를 깨고 양반 초상화는 물론 여인의 인물화까지 제작한 예술인으로 지금도 한국화단의 관심 인물이기도 하다.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 묘사에 주력한 점, 많은 필선을 사용하여 요철, 원근, 명암등을 표현한 점, 정장관복 초상인 경우 주인공의 오른쪽 어깨 위 등 쪽으로 두 개의 볼록한 주름 같은 모습 (단추)이 있는 점 콧대 등 얼굴의 뼈가 나온 부분을 하얗게 칠하여 백광을 주는 점, 주인공이 깔고 앉아 있는 화문석의 문양과 각도가 시대적으로 변한 점으로 볼 수 있다.

  채용신은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다. 채용신이 그렸다고 전하는 고종어진은 여러 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채용신은 1901년 궁중에서 고종 어진을 그린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밑그림을 본으로 하여 여러 번 고종 어진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은 고종임금이 정면을 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특이한 점은 배경에 오봉병이 둘러져있다는 점이다.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오봉병은 왕조의 무궁함을 상징한다. 왕의 공간임을 암시하는 오봉병을 그려넣어 쇠락해가는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용신의 어진은 전통 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단아한 얼굴은 진지한 표정을 지녔다. 동그란 안경테 속의 두 눈은 신중하고 차분하다. 오른쪽 눈동자가 약간 한쪽으로 쏠려서 눈빛은 더 예리하게 보인다. 목 부분의 흰 동정 위에는 구불구불하고 굵은 수염이 내려와 강직한 성품을 더해준다.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으니 이 사람은 글공부하는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부채를 거머쥐고 있는데, 손의 모습에서 뭔가 결연한 의지를 읽게 된다.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인 면암 최익현(1833년-1906년)의 초상화(보물 제1510호)는 우측 상하단의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채용신의 초기 작품에서 풍기는 조심스럽고 근실한 화법과 소박한 화격이 최익현의 우국지사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고 있다.

 특히 서양화풍의 수용에 따라 명암법의 구사가 인물의 얼굴 묘사는 물론 옷주름의 처리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난 조선 후기 초상화의 대표작이다.

 운낭자상(雲娘子肖像, 중앙박물관 소장, 120.5×62.0cm)은 얼굴 표현 등 전체적으로는 전통 화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담채에 의한 음영법과 옷주름에 가해진 입체감 등에서 서양 화법을 보인다.

 이처럼 절충 양식은 조선 말기와 근대의 초상화에서 보여지며 채용신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운낭자(雲娘子)는 평안도 가산의 관청에 소속된 기생으로,이름은 최연홍(崔蓮紅, 1785년-1846년)이다. 27세 때인 홍경래의 난 때 군수를 도운 일로 당시 조정에서는 그녀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기생의 신분에서 제외시켜 주었으며, 논과 밭까지 하사하였다고 한다.

 운낭자의 27세 때 모습을 연상하여 그린 이 작품은 사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연상시킨다.

  부여김동효영정(충남 유형문화재 제157호)은 채용신이 1926년에 그린 것으로, 완숙한 경지가 엿보인다.

 이와 관련,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은 지난 2001년 6월 26일부터 8월 26일까지 ‘채용신 탄생 1백50주년 기념전’을 개최하며 예술 세계를 한국 화단에 내놓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묘소는 전북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표(墓表)에 ‘통정의관평강채공동근 숙부인전주이씨지묘(通政議官平康蔡公東根 淑夫人全州李氏之墓)’로 쓰여져 있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