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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고창고인돌 이순신통제사의 이름 새겨진 것은

 

  

 

 무장향교 대성전(문화재자료 제107호, 전북 고창군  무장면 교흥리 109-1).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 기관이다.

 무장향교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화재로 불타 없어졌지만 그 뒤 헌종 8년(184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홍살문 등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고 한다.

  무장향교 옆 논둑길로 오다보면 고창 고인돌에 이순신통제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고인돌에 통제사 이순신 이름이 새겨진 것’은 김위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무장면 송현리 송현마을 첨금정에는 아직도 뚜렷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5백년이 다가도록 누가 거들떠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전북에 이순신장군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일대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고인돌군이 자리하고 있어 널리 알렸으면 한다.

 특히 인근의 부안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과의 거리도 멀지 않아 잘 알려지면 유명해질 것이다.

 전라금석문연구회(회장 김진돈)가 '이순신(장군) 이름이 적힌 이 금석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통제사 이순신이 머물렀다는 '첨금정'이란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내용을 '전라금석문연구' 회보 제14호(2009년 12월 30일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통제사의 이름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아마도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시 명랑해전에서 아끼던 부하 강동현령 김위(1567-1597)가 전사하자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고 장례를 치르던 장소로 추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바위에는 이순신이 바위에 앉아 옷깃에 눈물을 적셨다는 장소 '첨금정'이라 전하고 있으며, 통제사 이순신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저처럼 큰 바위에 글씨를 새길 수가 있을까.

 

 '서기 1597년 정유재란.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 등은 14만 대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진격해 들어온다. 남원성에서 일본군과 맞붙은 조명연합군은 끝까지 싸우다 전멸하는데,이 전투에서 무장면 송현리 김해 김씨 문중의 '천록'과 '천귀' 형제가 순절한다. 전쟁으로 아들 둘을 모두 잃은 김씨 문중의 비통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터. 얼마 못가 '천록'의 아내인 '연안이씨'마저 마을 뒷산에서 자결하고 만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모의 잇따른 죽음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위'와 '현'은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휘하에서 싸우다 진도전에서 목숨을 읽는다. '위'와 '현'의 할아버지 '수연'은 노량해전(1598)에 출전해 먼저 간 아들과 손자의 뒤를 따라 장렬히 전사한다.

 위의 내용은 무장면 송현마을 드넓은 논 중앙에 홀로 서있는 '기훈암(공훈을 기록한 바위)'과 이곳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해김씨 제단비'의 글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김해김씨 문중의 3대 이야기다. 조선 전역이 피로 물든 전란 중에 가족 하나 여의지 않은 집이 없었을 터지만 양반 가문에서 그것도 할아버지-아들-손자 3대가 한 전쟁에서 순국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보통 번듯한 비석에 글을 새길 법도 한데 전쟁 통에 비석 마련할 여건이 안 되었든지 논 한가운데 우뚝 선 자연석(고인돌)을 '기훈암'이라 하고 '천'과 '위', '현'의 순절을 기렸다(인터넷 자료)'


 금석문이 만들어진 연도는 1597년(만력 25년)으로 '통제사 이순신 명(統制使 李舜臣 銘)'/선무종신공신/김해김공 휘 한 천귀 순절'이 음각으로 되어있다는 김진돈회장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송현마을에 정유재산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전해 내려온 순절비는 가로 5m, 세로 4m, 높이 1.5m의 고인돌로 한 면에 '만력 25년 10월, 통제사 이순신명, 선무원종공신....'이라는 글귀가 전북에 있음이 자랑스럽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휘하에 총애하던 부하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입관시 묘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눈물로 갑옷을 적시며 애도하며 비문을 남겼다고 전한다.

 역사란 먼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오늘의 나와 무관하지도 않다. 역사는 후대의 해석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지는 않을까.

 송현마을에서 찾은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에 '상상력'을 채워 넣어 되살려본 김해김씨 문중의 3대 이야기는, 요즘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사회지도층들은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할 만큼 의롭고 충성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