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산구릉에 아름다운 호수를 차려놓는다. 순백의 설원이 열리면 하늘을 우러르고 바다를 읽는다. 바람을 보듬고 눈덩어리 된 겨울 숲에 도란도란 말을 걸어 보는 즐거움.
태고의 신비를 키운 만년설은 서양화가 이성재(60)씨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하얀사 고운 속살, 붉을 사 맑은 영혼’의 세계.
“어제 산에서 본 아름다움은 지금 느끼는 아름다움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이지만 인간사는 곡절의 연속이요, 변화의 파고가 쉴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다시 산으로 이끌리게 되고, 모든 풍경은 더 더욱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거센 바람을 이겨내느라 땅을 기는 키 작은 나무 하나, 땅을 고른다. 그 나무에 눈꽃이 핀다. 눈밭에 털썩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래도 추운 줄을 모르겠다. 경치에 얼큰하게 취했기 때문이다. 이때 산 정상에서 먹는 따뜻한 한 그릇의 컵라면은 근사한 풍경만큼 평생 남을 만한 기억으로 자리한다.
“봄이면 지리산 자락 하늘 아래 첫 동네 구례 산수유마을의 돌담길 굽이마다 노란 꽃잔치가 열립니다. 엄지 손톱 만한 노란색 산수유꽃은 비록 크기는 작지만 한 그루에 수만 송이가 달려 있어 한꺼번에 꽃송이를 들이대면 온통 노랑 물감을 뿌려놓은 듯 장관을 이룹니다”
산동면 산수유꽃이 노고단의 운해와 반야봉의 낙조, 섬진강 청류 등과 함께 구례 10경에 꼽히는 연유다. 아름답게 지리산에서 발원해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하천 계곡을 따라 수백 그루의 산수유나무들이 지천으로 노란 꽃물결을 이루지만 작가에게는 산고(産苦)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다.
꽃잔치를 즐기려는 가족들과 꽃나무 아래 순결한 언약을 나누는 연인들의 그림자가 가득함 때문이런가, 프리즘이 아주 넓다. ‘산동마을’이란 작품이 담고 있는 것은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맑디 맑은 계곡물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 마루에 앉아서도 계곡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별천지.
흰색의 명도와 채도가 선명하고 맑은데다가 굵은 터치 때문에 풍기는 이미지는 더욱 강하고 호소력은 더 더욱 배가된다. 오렌지빛 석양이 산에 부딪치는 사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자신은 찬란한 아침을 가져다준다.
산수유마을 한참 더 아래, 광양의 ‘눈물 바위’에 서면 지리산과 섬진강, 하얀 매화꽃이 어우러진 그림같은 풍광에 토해내는 한마디 감탄사 ‘아’. 나도 모르게 너른 마당 너머로 산수유 아름다운 솟을대문 앞에 서면 초록빛 보리밭의 물결과 만난다.
지리산을 포함, 금강산, 월악산, 강천산, 모악산, 월출산, 대둔산 등은 독특한 시적 감흥으로 토해내고, 이내 청갈함, 순백함, 청초함이 그렇게 둥지를 튼다.
봄 기쁨과 겨울 기쁨은 여러 형태의 산으로 탄생하고, 여름날 기쁨은 이들의 살붙이로 모란, 가을날 기쁨은 국화로 각각 갈무리된다. 그 메시지는 우리 산하의 잔칫상이 이보다 더 풍요로울 순 없다는 해석을 낳고.
여섯 번째 개인전(호주 울티모센터 아트륨, 1998년)은 전통의 닥지를 사용해 텁텁하고 은은한 우리네 정서에 부합되는 분위기를 연출 그 맛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
두터운 종이 위에 그려내는 설산과 정물들은 이전의 작품에 비해 선명도가 덜 하지만 한층 고요함과 침묵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바람 한줄기가 청초한 들꽃과 함께 오곡이 감향(甘香)을 몰고옵니다. 청향(淸香)도 명징하게 피워오릅니다. 이렇게 좋은 날, 우리 모두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면서 시같은 그림이나 그림같은 시를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작가는 어젯밤, 작품에 몰두하다가 창밖이 고요해짐을 느끼면서 비로소 새 날이 밝아옴을 눈치챘다고. 장철주시인은 이화백의 ‘산’ 그림을 보고 ‘푸르게 물든 아침’이란 시로 화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뜨거운 증거다’고 말하는 작가는 전주 남부시장의 막걸리 한 사발로 잠시 온갖 시름을 내맡긴다. 꿈을 낚는 ‘몽상 낚싯줄’ 세상에 길게 드리운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1.작가의 말
지리산이 겨울을 쓸어내리면 섬진강은 바쁘게 봄으로 달려간다. 군데군데 흰 모래사장은 배꼽 티 입은 처녀의 볼마냥 봄볕에 일광욕 즐기고, 청죽 숲은 살짝 이는 바람결도 좋아라고 속살을 드러내놓는다. 이맘때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구례 산동마을은 온통 노란 치마 저고리 일색이다. 춘심이 바야흐로 무르익을 무렵, 산수유축제가 펼쳐지면 온 동네는 떠들썩거린다. 이내 맘은 노오란 꽃터널을 이룬다.
2.미술평론가 최병길씨의 평
최근에는 ‘산’시리즈에서 붓터치의 ‘흐트러짐’과 ‘질서정연함’을 어우르고 있다. 종전의 ‘산’에서는 붓터치들이 마치 도열하듯이 ‘질서정연함’을 견지하고 있지만, 요즈음에 보여지는 그 ‘흐트러짐’은 작가의 풍요로워진 정신적 자유의 상징이며, 감성에 따른 유희성의 가미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산’의 윤곽선만을 강한 터치로 남기고, 설산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까닭이다.
3.작가가 걸어온 길
완주 출생
개인전 11회, 초대전 8회(일본, 중국, 호주, 서울, 전주)
화랑미술제 4회(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출품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5회
전북미술대전 연 7회 입선 및 특선,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대한민국수채화대전 등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전국벽골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전북미술협회 수석 부지회장, 워터칼라페스티벌 전북지회장
(현)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 위원,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전북지회장
(현) 전북아트페어 운영위원장, 전주일요화가회 지도교수, 이성재갤러리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