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과 '채석강 도화소'
정읍시립박물관은 18일부터 22일까지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이를 미래 세대와 공유하기 위해 유물을 공개 구입한다.
이번 유물 공개 구입은 일제강점기 신태인 육리마을에서 ‘채석강도화소’를 운영한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의 행적과 관련된 기록물을 최우선으로 삼을 예정이다.
채용신은 전북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어진화사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을 가리킨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그린 초상화 4점이 2023년 정읍시에 기탁됐다.
항일운동가 김직술의 후손인 김대수 씨와 정읍시 신태인읍 장성섭 씨가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 2점씩을 기탁했다.
김대수 씨가 기탁한 작품은 1911년에 그린 김직술(1850∼1920)·김환규 부자의 초상화다.
초상화의 보존상태가 양호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1910년대 채용신의 전성기 작품이고 당시 태인 고현내(현재 칠보)에 있던 김직술 집에 머물면서 그렸다는 점에서 채용신과 정읍의 역사적 인연을 알려주는 대표 유물이다.
고현내 출신인 김직술은 정읍이 낳은 대표적 항일 운동가이다.
1889년 동몽교관의 관직을 맡았고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과 함께 항일 의병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정성섭 씨가 기탁한 작품도 초상화다.
정치열·백춘화 부부를 그린 것으로 작품 연도는 각각 1930년과 1931년으로 추정된다.
채용신이 정읍 신태인에 있던 '채석강 도화소'에서 주문받아 그린 것으로, 1930년대 작가의 기법과 당시 병풍 제작 기술이 그대로 담겨 있어 가치를 더한다는 평가다.
신태인 출생인 정치열은 1909년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과 후릉참봉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채용신은 무과 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제작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했다. 그는 이후 집안 연고지인 전북 일원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41년 6월 정읍 신태인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40여 년을 전라도에서 보냈다.
채용신은 전통적인 초상화 제작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 기술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옮겼다.
채용신은 1850년(철종 1) 2월 4일 서울 삼청동에서 여수 돌산진 수군첨절제사를 지낸 채권영(1828~1901)의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동근이고 호는 석지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전주에서 살았으나 할아버지 채홍순 때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유년기부터 그림에 몰두했다. 특별한 스승도 없었지만 천부적 소질로 일찍이 두각을 드러냈었다.
그는 하지만 화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림 솜씨 못지않게 활쏘기에 능했다. 1886년(고종 23) 실시한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때 이름도 용신으로 개명했다.
1923년부터는 아예 직업작가로 나서 정읍시 신태인읍 육리에 ‘채석강 도화소’라는 공방을 차렸다.
'연전에 높은 구중궁궐에서 임금을 모실 적에, 나의 호를 바꾸어 내려주사 송구스러운 느낌 남아있네. 특히 ‘강’(江) 이름을 가리켜 깨끗한 경치로 허여하시고, 그대로 ‘석(石)’ 글자를 남겨 두어 절개가 굳다고 논하셨다. 남은 인생 어찌 시선(詩仙)의 취미를 본받겠는가? 노쇠함에 따라 성주(聖主:고종)의 은혜를 잊지 어렵도다. 지난 일 지금에 흘러간 물처럼 탄식되는데, 종남산(終南山:남산) 빛은 저녁 구름에 어둡구나’
'석강'이라는 호를 내린 고종황제를 그리워하며 읊은 것으로 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된 채용신의 시이다.
이 공방은 아들 채상묵과 손자 채규영 등과 같이 운영했다. 이 때부터는 주로 사진을 받아 초상화를 주문제작 했다.
“사진이 없으면 출장 촬영도 가능하며 초상화가 실물과 닮지 않으면 책임 지겠다”는 안내문구와 가격표시, 작가 이력 등을 담은 전단지를 배포해 널리 홍보했다.
그의 초상화는 고가에 팔렸다. 쌀 한말(18ℓ)이 3.5원 하던 시절 전신초상 100원, 반신상은 80원이나 받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 시기에 생산된다.
채용신의 도화소가 있었던 정읍 신태인 육리는 여느 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푸른 스래트 지붕의 집이 채석강도화소 자리다. 지금은 가옥 자체가 리모델링돼 도화소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허나 집안 구조는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현재 그의 묘는 정읍시 이평면 천태산 백운사 가는 방향 산자락(이평면 산매리 산 58-4)에 자리하고 있다.
*채용신의 무관 시절의 자화상(1893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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