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순창 관수당 마롱암

순창 관수당 마롱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가 눈길을 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 1689)은 학문과 정치가 하나로 결합된 조선 후기를 상징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송시열의 동생 송시걸(宋時杰)이 순창군수로 재임(1672~1675)한 적이 있다. 이때 송시열은 이때 순창을 방문해 여러 흔적을 남겼다.

쌍치면 종곡리 종곡마을에 현재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관수재(觀水齋)가 있다. 

이곳은 원래는 송시열의 제자인 농암(礱巖) 김택삼(金宅三·1619∼1703)이 지어 유유자적하며 지냈던 곳으로 원래 명칭은 '관수당(觀水堂)'이었다.

관수재 뒤편 바위에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관수당 마롱암(觀水堂 磨礱巖)' 암각서(巖刻書)다. 
부안김씨 선산 입구 야산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다.

이 가운데 높이 2m, 지름 4m 정도의 큰 바위 전면에 글씨를 새겨 놓았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지상에서 150㎝ 부근이며, 글씨의 크기는 세로 50㎝, 가로 240㎝ 정도의 대자에 속한다.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는 송시열의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활달하고 기백이 있는 후기의 필치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송시열이 김택삼을 방문하고 써 준 것이라고 한다.

마모가 되었지만 각자(刻字)의 깊이가 깊어 윤곽이 뚜렷하고, 비교적 정교하게 새긴 탓에 지금도 필획의 강약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관수당 마롱암(觀水堂磨礱巖)’이라고 행서로 새겨져 있으며, ‘우암 서(尤庵書)’라고 되어 있어 우암 송시열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의 글씨에 이어 ‘부녕 김씨 세천(扶寧金氏世阡)’이라고 해서로 새긴 글씨가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글씨이다. 

'관수당 마롱암' 암각서는 송시열의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활달하고 기백이 있는 후기의 필치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관수(觀水)'란 '맹자' '진심장구 상편'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흘러간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며 물의 속성을 강조한 글이다.

 군자의 학문은 웅덩이를 채우는 물과 같아서 한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비로소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학문의 방법을 담고 있다.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은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이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이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건너뛰는 법이 없다. 건너뛸 수도 없다.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이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학문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관수루'란 이름 지었다.

낙동과 양정 사이에는 옹기점 마을이 있고 낙동나루터에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수루(觀水樓)'가 서있다. 

조선 말기 고종 때 홍수피해로 떠내려 가버린 관수루는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지은 것이고 그 내부에는 낙동강을 노래한 시 10편이 걸려있다.

거창 수승대(명승) 구연서원 '관수루'라는 의미도 남다르다. 

'요수정(樂水亭)'과 마주하고 있는 "관수루(觀水樓)'. 두 이름 모두 물과 관련된다. 

'요수정'은 '논어'의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따온 이름이다.

논어 '옹야편'의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의 준말이다.

'관수루'는 '맹자'의 '물을 보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물만큼 자연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물 흐르듯 한 삶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될까 싶다.

'관수루'는 거창신씨 요수공 후손과 고을 사림들이 힘을 모아 1740년에 건립했다. 

조선 전기 안음현 원학동의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의 문하엔 아들 임훈(林薰)과 임운(林芸) 형제를 위시하여 신권(慎權)·조숙(曺淑) 등이 동문 수학했다. 뒷날 이들은 이 지역의 향촌 사대부 계층을 형성하여 영남 사림파의 일원으로서 출사했다.

신권은 "사람의 벼슬은 남에게 있고 하늘의 벼슬은 내게 있다."며 은거하여 후학 교육에 힘을 쏟았다. 

뒷날 후학들이 신권을 추모하여 1694년 구연서원(龜淵書院)을 만들고 성팽년을 함께 배향했다. 관수루를 지어 서원의 문루로 삼은 것은 17세기와 18세기에 이미 향촌 사림 세력이 크게 형성되면서 사림의 위상을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누각 옆 서쪽 바위에는 '욕기암(浴沂岩)', 동쪽에는 '풍우대(風雩臺)'라 새겼다. 

이는 공자(孔子)의 물음에 대하여 제자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시가(詩歌)를 읊조리고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명리(名利)를 잊고 유유자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늦봄에 봄옷이 장만되면 관(冠)을 한 사람 오륙 인과 동자 육칠 인으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리다.[莫春者에 春服旣成이어든 冠者五六人과 童子六七人으로 浴乎沂하여 風乎舞雩하여 詠而歸하리이다]'(논어 선진(先進) 25장).

이는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함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가 몇몇 제자에게 각자가 가진 뜻을 말해 보라고 하자, 증석(曾晳)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다. 공자는 증석의 이 대답을 듣고 감탄하며 그를 인정했다.

'관수루'는 천하의 절경에 세운 요수정과 거북바위 수승대와 마주한다.

 '관수루'는 서원으로 출입하는 문루이다. '관수루'가 들어선 자리, 그 모습, 그 이름, 모두가 예사롭지 않다. 

자연석 암반 사이에 세워진 '관수루'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누각이다.

 '요수정(樂水亭)'과 '관수루(觀水樓)'. 두 이름 모두 물과 관련된다.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관수루'가 들어선 자리가 절묘하다. 이 누각은 자연석 암반 사이에 누각의 높이와 커다란 바위가 거의 일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누각과 달리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필요 없다. 바위를 밟고 누각으로 건너가면 그만이다. 혹시 발을 헛디딜까 싶어 바위와 누각사이에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엔  '관수루'를 노래한 현판이 빽빽하게 걸려있다. 이 가운데 관수루에 올라 주위 풍광을 잘 묘사한 후손 신종립의 시를 옮겨본다.

'붉은 누각 푸른 강가에 우뚝 솟았고
이어져 흐르는 물소리 서원 뜰에 들리네
천척의 맑고 깊은 물 어찌 줄일 수 있을까
사철 이어가며 한시도 멈추지 않네
석벽 돌아 거슬러 오르면 폭포를 이루고
원천 따라 합쳐진 물이 바다로 흐르네
마루 끝에 앉아 들으니 어찌 술수 부릴까
마음 씻고 보니 문득 형체를 잊게 되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이층 형태이다. 처마 끝은 학이 날아가듯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네 곳에 활주를 세웠다. 활주도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기둥 높이가 제각각이다. 누각을 받치는 1층 기둥은 그랭이질해 세웠고, 문으로 들어가서 보이는 안쪽의 기둥은 휘어진 곡선이 예술이다. 과장하면 마치 절구통을 세워놓은 모습이다.

거북바위 수승대 왼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섬 숲이 있고, 시야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맑은 물속에 잠긴 '수승대'와 그 너머 '요수정'이 있다. 선경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