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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정유재란때 남원부사 임현의 손자와 이경보

 

임현(任鉉 1549-1591)은 정유재란때 남원부사로서 남원성의 수비를 위해 분전하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이 유물은 임현의 행장(行將) 초고본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이것은 임현의 전기자료인 동시에 임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읍성은 일본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6만 왜병의 공격을 받아서 성이 함락되고 민관군 1만인이 옥쇄 순국했으며, 산하가 모조리 불타고 파괴되고 폐허가 됐다.

그 당시에 남원부사(南原府使) 임현(任鉉)사또의 어린 손자(5, 6)가 왜군에 납치되어 일본 쿠슈(九州)의 남단 다네가 섬(種子島)으로 끌려가게 된 것. 그 어린 손자가 일본 땅에 살아남아서 400년이 흘러간 오늘까지 핏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성씨는 사성(賜姓)으로 이노모토’(井元). 이노모토 집안은 그곳 명문으로, 큰어른 이노모토 마사루(井元正流)옹은 동경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출신이며, 그곳의 3선 민선시장까지 지낸 유명인사라고 한다.

임씨문중에서도 그런 한스럽고 피 맺힌 이야기를 수년 전에사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통교(通交)하게 되고 양쪽 집안이 상호방문하는 등 우의와 친교를 다졌다. 그리고 이노모토 가족 일행이 한국을 방문, 남원의 만인의총과 충렬사(忠烈祠)에 참배하고 순의제향(殉義祭享)을 올렸다는 것. 한 가문의 흘러오는 뜨거운 핏줄, 그 뿌리의 혈흔(血痕)이 아니랴!

 

1597년 정유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남서해권과 곡창지대 호남을 장악하고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8월로 접어들면서 왜군은 원균이 지키던 한산도(칠천량전투)를 무너뜨렸다. 임란 이후 줄곧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남서쪽으로 진격해 오는 왜군을 더 이상 막을 힘이 없었다.

왜군이 남쪽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남원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명나라의 지휘관 양원은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고 호남지역의 관군들도 남원으로 몰려들었다. 지난 임란 때 웅치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복남을 비롯하여 남원부사와 순천부사 등 1,000 여명에 가까운 장병이 남원성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죽음이 두려운 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비장한 웅변을 남긴 이복남은 왜군의 진을 향하여 다래를 크게 치자 창칼을 높이 든 1천여 명의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6만의 왜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성 밖에 진을 치고 타다 남은 돌담과 흙벽을 밟고 총을 겨누었다. 명군과 조선군은 불화살(화전)과 승자소포로 맞섰으나 조총 소리가 울릴 때마다 아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무더기로 쓰러져나갔다.

815, 급기야 왜군들이 성 밖 해자를 풀더미로 평평하게 메우고 성벽을 넘어 무자비하게 공격하자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서는 조선군과 뒤엉켜 피아간 칼날이 번쩍거렸다. 숨 가쁜 살육전은 그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새들도 숨을 죽인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은 되레 음산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였다.

양원은 교묘하게 성을 빠져 달아났고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 등 관군과 사민들은 모조리 산화하고 말았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시체가 무덤을 이룬 성안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일부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 포로 속에 이복남의 막내아들이 있었다. 일곱 살의 어린 이경보는 혼란한 틈에 가족을 잃고 홀로 된 채 왜장 모리 히데모토에게 포로로 잡힌 것이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갈 것이다."

 

겁에 질린 경보는 아버지의 원수에게 잡혀가는 신세였지만 어찌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경보는 모리에게 받은 리노이에 모터히로(李家元宥)란 이름으로 살면서 점차 일본인이 되어갔다.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의 영지인 죠슈번에서 '리노이에' 가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사진

 

정유재란 당시 남원부사였던 임현의 행적을 기록한 글의 초본<육군박물관 소장>

 

남원시 향교동 만인의총 기념관엔 호미를 들고 왜군과 맞서는 남원성 전투<만인의총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