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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돌싸움(石戰, 석전)

전주 돌싸움(石戰)

 오래전 기억 속 까물거리는 풍속으로 목숨을 건 놀이인 ‘석전(石戰)’이 있었다.
석전은 패를 갈라 돌팔매로 승부를 겨루는 돌싸움으로 하천 변이나 들판에서 주로 성행했던 놀이다. 사실, 전쟁이라 붙인 한자어를 봐도, 돌을 던지고 싸우며 논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석전을 하다 다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죽는 경우까지 있었던 만큼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석전을 치른 이후 승패가 갈리면 죽거나 다쳐도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니, 요즘 세상에는 있을 수 없다.
1897년부터 1925년까지 약 28년을 전주에서 생활한 의료선교사 마티 잉골드(예수병원 초대 원장)가 남긴 자료는 일기, 보고서, 편지, 진료기록 등으로 다양하다. 이 자료에서 당시 전주의 세시풍속, 민간신앙, 민간요법 그리고 의식주와 같은 생활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설날의 설빔과 세배와 같은 풍속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정월대보름에 행했던 석전, 허수아비 버리기, 어부슴과 같은 풍속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문헌에만 남아있다. 
나아가 전주사람들의 의식주를 살펴보았는데, 짚으로 지은 초가집에는 나무를 태워 방을 데우는 온돌이 있고, 음식은 주로 밥과 김치다. 옷은 신분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입는데, 잉골드는 화려한 혼례복에 대한 기록을 자세하게 남겼다. 모든 병은 귀신이 들어와서 생기는 것으로 먼저 병에 걸리면 가정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고, 그리고 무당을 찾는다. 이게 바로 당시 전주, 전주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석전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전국 각지에서 행하여졌던 한국의 세시풍속이었다. 이 연구는 석전이 조선 초기 태조에 의해 정규 군부대로 창설됐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태조는 전쟁을 위한 무재(武才)로써 석전부대인 척석군(擲石軍)을 창설하였으며, 더불어 민속놀이로서 유희(遊戱)적 요소를 갖추어갔다. 척석군(擲石軍)은 중추(中樞) 관리 하에 편성했다. 세종 9년에 이르러 석전은 체계화된 형태를 갖추었다. 이는 전투놀이 석전의 형식이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퍼져갔으며 변용되었다. 의성 가마놀이의 형식과 용품들이 석전의 경기형식과 용품을 모방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의성 가마놀이 및 군위 박시놀이 속에 석전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은 석전에서 파생하여 발전한 세시풍속 임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석전은 무예인 수박(手搏)과 개연성이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석전의 경기형태는 다른 세시풍속인 의성 가마놀이 및 군위 박시놀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보이는 몸싸움의 형태와 명칭, 용어 등은 조선 초기 수박(手搏)과의 개연성을 보인다.


『수서(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연초에 패수(浿水, 대동강)가로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요여(腰輿)를 타고 나아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차례 하다가 그친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44에는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격구(擊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하였고, 「열전(列傳)」47에는 우왕(禑王) 6년(1380)에 임금이 석전놀이를 관람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모두 5월 단오(端午)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기에 이르도록 석전은 단오 행사로 나온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년 5월 5일에 의하면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街路)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石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3년 5월 3일에는 “상왕(태종)이 병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단오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등 종친(宗親)들이 이 놀이를 관전(觀戰)하였을 뿐 아니라 독전(督戰)하였다고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권30 4년 5월 6일에 보면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곧 이 놀이가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8, 명종 10년(1555) 5월 27일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임금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金海) 사람 100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安東)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
조선 후기 이후 석전놀이는 단오 행사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옮겨졌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17 47년 11월 18일에 임금이 평양(平壤)에서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대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元日)에 벌이는 석전도 포청에 분부해서 못하게 할 것을 하교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 속에 석전놀이가 중지된 곳도 있고 그 규모도 광역의 단위에서 일부 마을 단위 행사로 축소되었다가 해방 이후 점차 사라졌다.
순창에서는 마주 보는 복실리와 장덕리의 석전이 정월 대보름마다 들판에서 열렸다. 

 

전주에서는 삼천과 전주천 변에서 패를 갈라 동네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치러진 석전이 떠들썩했다. 싸전다리를 경계로 남천과 서천으로 강변을 끼고 편을 갈라 동남진패와 서북진패로 나눠 돌싸움을 했다. 
동남진이 학봉리패·사정멀패·남문거리패·반석리패·공수내패라면 서북진은 서문거리패·곤지리패·은송리패·빙고등패·군자정패·용머리골패였다. 
쌍방 패거리들은 각기 1백 명씩 10대-20대-30대 순으로 승부를 겨루며 행동권은 남동진이 남천교에서 싸전다리까지의 선이고, 북서진이 서천교에서 싸전다리까지의 선이다. 고함과 비명, 남천과 서천에서는 온통 소름 끼치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다 달이 중천에 오르면 그쳤다.
이 놀이는 기린봉에서 대보름달이 떠오르는 시각에 군호(君號)로 끼리끼리 패가 되어 진터에 포진했다. 이 때에 탐색군들은 연신 상대편의 정보를 살피곤 했다. 
이는 완산부성 젊은이들의 기개를 높혔던 놀이였지만 1920년 경에 금지됐다.
 석전은 용맹스러운 우리 민족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유래 깊은 전북 고유의 집단놀이다. 전쟁 등 유사시에는 석전꾼들이 동원되어 큰 활약을 하였다. 놀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우환을 떨칠 수 있었고 한 해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질병이 없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