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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

황미연 박사

이 연구는 일제강점이 시작되었던 20세기 전통문화의 전개양상과 그 사회문화적 배경을 밝히고 특히 권번과 기생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식민지 근대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까지 중앙과 달리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였으며, 연구 경향 또한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양분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권번과 기생은 식민시대에 일본과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약체화된 측면이 있지만 전통음악계 스스로 근대화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내면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해서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의 권번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정리 · 분석하였다.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권번의 전신격인 교방은 전국 8도에서 평안도가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 함경도 ·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 · 강원도 등의 순이었다. 교방에 있었던 기생들을 보면 감영이 설치, 운영되었던 곳에 집중적으로 존재하였다. 교방이 감영을 중심으로 한 행정중심지에 많이 설치, 운영되었으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를 비롯하여 순창군 · 무주부 · 광주목 · 순천 좌수영 · 제주목에 교방이 설치되었다. 전라북도에 존재하였던 교방은 전주 · 무주 · 순창이었다. 그리고 교방 설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남원지역에 기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교방과 기생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이어진 지역은 전주와 남원이고, 무주와 순창은 권번으로 전승되지 못하였다. 반면 군산 · 정읍 · 이리 · 부안 등에 조합과 권번이 각각 설립되었다.
1907년 여악 제도가 폐지되고, 이후 기생조합이 등장하였으며, 1915년경부터 기생 조합은 권번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라북도 또한 1915년부터 전주와 군산, 남원, 정읍, 부안에 조합과 권번의 명칭이 혼용으로 사용되며 설치되었다. 기생조합의 등장은 정해진 절차와 조직을 바탕으로 기생이 양성화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일제 통치수단의 하나로 자본주의에 의해 설립된 권번은 문화계에 있어 주식회사의 효시가 되었고, 기생조합과 권번이 양성화됨에 따라 이 곳을 중심으로 공연과 교육이 기획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생들의 연예산업의 참여는 이전시대의 상하구분에 연희되었던 양상과 달리 불특정 다수를 향해 예술성을 전개함으로써 새롭게 출연하고 있던 근대성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양과 일본문화의 유입에 따른 다양한 문화영향에서 기생들은 전통예술의 전문가로서 문화계의 중심부에 서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설립된 각종 공교육기관은 서양과 일본 중심의 예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재래의 전통예술 전승과 교육에는 무관심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권번은 수많은 명인 · 명창 · 명무들의 활동공간으로 자리 잡아왔고, 권번 기생들은 권번에서 예술적 기량을 연마하고 전개하였으며, 학습과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받으면서 대중적 명성과 수익을 확보하였다. 기생조합과 권번은 기생들의 종합예술교육공간으로 다채로운 활동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기생들의 대사회적 위치를 제고시킨 기관이었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신분적 제약을 가지고 국가 소속 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면 일제강점기에는 기생 스스로의 선택과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공연활동을 펼치면서 예술관도 확립되고 생계해결차원의 직업관도 뚜렷해지고 이전의 기생들과는 의식과 활동 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근대성의 한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기생들은 권번에서 경제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가무를 익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예인으로서의 자질을 검증받을 수 있었고, 아울러 크게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전통문화가 사멸의 위기를 처하였을 때, 기생은 전통예술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라북도 권번들의 교육과정은 가 · 무 · 악에서 대동소이하였지만, 권번별로 특징이 있었다. 전주권번은 가 · 무 · 악이 교육되었고, 각종 공연과 행사에서 이들 종목을 시연하였다. 또 전주권번은 전통예술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한 곳이었다. 남원권번은 예절교육과 묵화, 서도 등을 교육하였고 춘향제와 같은 주체성이 강한 행사와 민족의식 고취의 발로로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았다. 반면에 신흥도시 군산에 세워진 군산소화권번은 일본어, 일본노래를 가르치는 등 시대적 요구에 발 빠르게 움직이기도 했다. 정읍권번은 재담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하고, 춤 분야에서를 선도하는 등 다른 권번과 차이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내 권번에서는 전통 예악의 단순한 전승을 뛰어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점차 자본주의화 되어 가는 사회에서 권번과 기생은 예술의 수요를 요구하는 행정중심도시와 근대도시에 자리를 잡으면서 당대의 예술과 예인의 공급처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시대정신, 즉 혼성된 근대적 양식을 표출하였다. 이처럼 기생들은 당대의 전통예악을 전승하면서도 대중문화의 수요에 발맞추어서 대중엔터테이너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전라북도 기생들은 자신들의 본연 업무로 평가되었던 가 · 무 · 악 등의 예술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대 기생들은 국내, 외 공연과 경연대회 참가, 라디오 방송출연, 서화 활동, 중앙 및 다른 지역으로 진출 등을 통해 예술인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당대 기생들은 예술 활동과 더불어 사회활동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남자 임원 배척운동을 전개하는 등 권번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평사와의 갈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관철해 나가는 한편, 예기조합을 비하하는 모습에는 집단으로 대처를 하였다. 자신들을 멸시하였던 행동에는 법적 대응도 불사하는 등 주권행사를 펼쳤다. 기생들은 당시 조합비 감하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수입 감소에 따른 의지를 행동으로 옮겼으며, 권번을 주식회사로 고치는 등 조직적인 자치활동도 전개했다.
기생들의 다양한 사회활동은 이들의 사회적 역할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산품 애용과 단연 운동을 전개하며 외국동포를 위한 구제활동이 그것이다. 면천으로 인해 기생들도 당당한 사회인의 일원임을 확인하며 자신들의 기 · 예능을 통해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를 하게 되었다. 전주기생들이 3.1 만세운동 참여했다는 점은 이들의 민족의식 즉, 의기(義妓)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의 기생은 특수 직업여성으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보여주면서, 유행의 첨단에 서서 일본과 서구문화를 이 땅에 이식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전승자로서 또는 새로운 예술의 흡수자이자 창조자로서 근대 공연예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였다. 따라서 기생은 식민지지배가 닦아놓은 양식을 택해 전통을 전승하고 지식을 얻고, 그 구조를 돌파해 사회로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있어 권번과 기생의 역할이 일방적인 식민화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주체들의 지속적인 저항, 도전, 재창조, 협상 등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주체성을 확립해갔다.
이제까지 권번과 기생에 대한 시각은 이들이 방탕함과 문란함을 조장했다는 편협한 인식으로 인해서 저평가되었던 면이 있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들이 역사적, 사회적 변동의 기류를 통과하면서 예술가로 사회인으로 주체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새로운 시각을 견지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본고에서는 식민지적 근대가 요구한 일방적인 문명사회의 강요에서 벗어나, 탐욕의 생존전략이 아닌 스스로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권번과 기생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전통예술이 오늘까지 살아있는 문화로 거듭날 수 있었음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