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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강후진의 ‘송사지’에 기록된 고창 현장을 가보니] 정형화된 마한 텍스트, 이미지를 넘어서는 새로운 콘텐츠 필요




고창(당시 무장현) 출신 조선 후기 실학자인 강후진(姜侯晉)은 학계에 알려 지지 않았지만, ‘감영록’, ‘송사지’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전북의 실학자다. 강후진은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마한-삼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했고, 마한의 중심지가 현재의 익산 지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직접 답사해 기록을 남긴 것이 ‘유금마성기’다. ‘유금마성기’가 포함된 책 제목은 ‘와유록’으로, 말 그대로 누워서 역사적 현장을 유람한 기록으로, 코로나 19로 비대면 시절에 누워서 집에서도 체험하고 대리만족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소재다. 조선 후기 실학자의 자료를 토대로 그동안 고고학과 고대사에 집중되었던 콘텐츠를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기존의 자료와 연계하여 사적 지정, 국책사업 발굴 등의 기반이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 편집자

강후진의 ‘송사지’에 기록된 ‘고창문화 인문기행’ 이 15일 오전 9시부터 허흥식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승대 전북도청 문화유산과 학예연구관,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이문현, 이병열 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이종근 한국문화 스토리텔링 작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답사는 무장읍성, 공음면 칠암리 용산마을 고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상하면 오룡마을 오룡사와 고인돌, 선운사, 창담암, 동불암지 마애불, 도솔산 내원궁 등에서 이뤄졌다.

 '송사지'는 무장현감을 역임한 유희춘, 정권 등이 작성했던 무장읍지를 토대로 강후진이 추가 보완한 조선후기 지리지로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무장읍성 ‘사두봉과 용소’는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 마을의 우환을 예고,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어 무장 고을을 다시 번영하게 했다는 풍수담이자 지명 유래담이다. 이를 ‘사두봉 이야기’라고도 일컫는다. 무장고을 터를 반사(서리고 있는 뱀)형국이라고 해서 조석으로 양쪽 용소에서 안개(용이 내뿜는 김)가 솟아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면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돼 옛날 무장 현령의 세력이 드세었다고 한다. 예부터 ‘고창은 성자랑’, ‘흥덕은 양반자랑’, ‘무장은 아전자랑’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무장고을은 지방세가 강해 항상 이 고을에는 역량 있는 현감들이 부임해 왔다. 만약 사람만 좋고 역량이 부족한 현감이 왔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처럼 바닥이 드세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나 떨어져 있는 안진머리장(현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이 장터는 사두봉에서 마주 보이며,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우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아 장날이면 젊은 청년 한 사람씩 희생이 되었다.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이병열 사무국장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시주를 얻으러 온 중이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사두봉을 깎아 메워 버리면 옛날처럼 번창하는 기운이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 사람들을 동원해 사두봉에서 안진머리장이 안보이게 깎아 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했다. 그 뒤부터 안진머리장날에 싸움을 하고 살인을 하는 변은 없어졌지만 과연 무장에서 인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를 또 걱정하던 중에 도사 한 분이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일러주기를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예전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하고 남산 밑에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먹이가 생기게 되어 무장고을은 다시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다. 이 개구리 연못 자리가 지금의 무장장터이고 객사 주변의 나무들은 그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무장읍성의 삐딱한 정권의 비석이 더욱 더 눈길을 끄는 이유다. 아전의 텃새가 얼마나 드셌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여느 비석처럼 평범한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의 모습이 매우 다채롭게 되어 있다. 언젠가 공덕비를 세우라고 재촉했을 원님에게 ‘아나 공덕’하고 비웃는 모습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마음에 안들면 이곳의 원님은 왕따였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곳의 아전들은 출신성분이 고려시대 화려했던 토호들과 출세한 가문의 후예들인지라 자긍심과 기개가 대단했다. 제 아무리 현감이 부정축재하고 본전 치기를 하려고 해도 아전들이 짜고 현감을 왕따시켜 헛물켜게 했기 때문이다.
고창에는 왜 색채가 짙은 고분으로 알려진 장고형 고분이 있다. 공음면 칠암리 장고형 고분을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으로 부른다. 무덤의 형태가 전면(前方)은 네모나고 후면은 둥그런(後圓) 열쇠구멍 모양이다. 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은 사체를 매장한 곳이 뒷부분이고, 네모난 앞부분은 제단으로 보고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 한강 유역의 한성백제에서 발생, 4~5세기에 성행하였고, 5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소멸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백제의 장고형 고분은 시기적으로 너무 오래되고, 그 규모가 너무 커 묘제로서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까지 전라도 지방에 확실하게 알려진 전방후원분으로 칠암리 이외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고창 칠암리 용산마을 어귀에도 장고형 고분이라 일컫는 전방후원분이 있다. 고분은 안산에서 뻗은 능선 상에 위치하며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모습이다.
고창군 무장고을과 영광군 법성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인 공음면 석교리. 개갑장터는 만민평등을 주창하며 동학과 서학이 함께하는 국내유일의 종교성지다. 천주교 신자인 최여겸 마티아가 1801년 이곳에서 순교했고, 100여 년 뒤 1894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접주들과 교도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인근 구수내마을에서 봉기했다. 당시 개갑장은 영광 법성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장터 바로 지근거리에 석교창이 있어 배가 드나들었으며, 신안군도 등 섬들에서 키운 소를 배에 싣고 와 파는 우시장이 설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이곳 장터는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제사 음식을 구하러 멀리 안자시장(현 해리시장)까지 가는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무장 원님이 장을 세워 주었다는 효행담이 전하기도 한다. 또 일제 강점기 땐 의병들의 물자 보급소와 연락처로 활용되면서 일제로부터 미움을 사 없어졌다는 설도 있다. 구수마을에선 "동학농민군이 부른 '당뫼골민요' 있었다" 특히 ‘파랑새요’, 전봉준 유시‘ 등 동학 관련 노래가 드문 현실에서 의미를 더하는 값진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련 기사 새전북신문 2014년 8월 18일자’
‘어디만치 왔냐 솔갱이 떳다/어디만치 왔냐 말많다 馬來(마래)/어디만치 왔냐 당뫼골 멀었다/어디만치 왔냐 들갱변 떳다/어디만치 왔냐 一松旗(일송기) 떳다/어디만치 왔냐 송대장(宋大將) 쩌렁쩌렁/어디만치 왔냐 구곡(九谷)고랑 둥둥/어디만치 왔냐 어칠부칠 왔다’
이는 공음면 구암리 당뫼골(당시엔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골, 현재의 구수마을로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무장기포지))에서 1894년 3월 20일 무장봉기를 전후로 부른 민요로, 고창지역학연구소장(전 고창문화원장)이 1963년 김환수(1946년생), 이정봉(1933년생), 전윤오(1939년생, 작고 또는 생존 불명)씨 등 3명으로부터 채록, 새전북신문에 공개했었다.‘어디만치 왔냐’는 막대잡은 봉사와 또 동행하는 곰배팔이 길잡이가 서로 선창과 후장을 잇따라 계속하면서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서사성, 역사성, 상징성과 함께 한국적 정서 깃든 3.4조의 가락이 주를 이루면서 동학봉기의 뜻을 생생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노래를 해석하면, ‘솔갱이 떳다’는 솔개가 하늘을 날으고 있는 만큼 경계의 자세를 늦추지 말라는 의미며, ‘말많다 馬來(마래)’는 ‘마래’라는 지명을 통해 말이 많이 모여들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그 앞풀이에 따라 장을 못 보는 이유가 뒤풀이로 유기성을 지니며 진술되는 ‘장타령’ 형식을 취해 흥미를 더하고 있다. ‘들갱변’은 들강변을, ‘一松旗(일송기)’는 동학군들의 깃발을, 봉기할 장소에 자리한 소나무를, ‘송대장(宋大將) 쩌렁쩌렁’은 송문수(宋文洙, 1894년 12월 3일 영광에서 사형)대장을, ‘구곡(九谷)고랑 둥둥’은 현지의 지형을, ‘어칠부칠 왔다’는 그 사이 모두가 도착했음을 암시하는 가사에 다름 아니다.
1894년 3월 16일부터 18일 무렵, 사방에서 주야로 구수마을 앞 강변에 1,000여명이 사람이 집결했다. 그 수는 점차 불어나 4,000명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이들 가운데 수백 명은 법성 진량면 용현리 대나무 밭에서 죽창을 만들고 민가에서 총포 등을 마련해 갔으며, 3월 20일(음력)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을 주축으로, 일단의 봉기의 만반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처음으로 정부를 상대로 한 무장(창의포고문)을 선포, 농민군이 일어난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주변의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모두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결국, 1894년 3월의 1차 봉기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확산을 가능케 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구수마을은 지금은 1개면 소재지로 쓸쓸하지만 조선조 때까지 현감이 있었던 곳으로 숱한 역사적인 사연을 지니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 ‘동학혁명 발상지 기념비’가 길옆에 세워져 있다.이 노래를 통해 일개 군현 단위의 농민봉기가 아닌, 전국적인 농민혁명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당뫼골은 1914년 공음면이 생기면서 구암리 구수로 명칭이 바뀐 곳으로 면소재지에서 서북쪽 약 3km지점에 자리, 1700년대 중반에 형성됐다. 저수시설이 없을 때 9방향에서 물이 흘러 이 물로 농사를 짓는 곳인 만큼 구시내로 부르다가 뒤에 구수로 개칭했다. 고순택(高舜澤, 1858~1895)이 이곳 출신으로, 송문수대장의 휘하 군장(軍長)으로 1894년 3월의 무장기포에 핵심 요원으로 가담. 9월 2차 봉기 이후 관군에 피체되었다가 농민군 73명과 함께 처형됐다. 허흥식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강후진의 저서를 보면, 접 등 이미 오래 전에 동학과 관련될 법한 다양한 내용들이 나와 흥미를 끌고 있다면서 ”추후 학술대회 등을 통해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강후진을 이를 널리 알렸으면 한다“고 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