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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재난고’를 보물로 지정하자

고창군이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실학자 황윤석 선생의 일기인 '이재난고'를 보물로 승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창 출신 실학자 이재 황윤석 선생의 일기인 '이재난고'를 보물로 승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난 다음날 일행과 함께 점심식사로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1729년 오늘(525),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일기처럼 쓴 '이재난고(전북 유형문화재 제111)'에서 우리나라 배달의 역사250여년 전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 음식기록으로 보입니다. 176877, 나이 마흔에 시험을 치른 뒤 맛본 냉면이었으니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그는 서른한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결국 낙향해 생을 마감합니다. 이는 영·정조시대 최고의 천문학자 탄생기입니다. 시험을 마치고 치맥을 먹는 요즘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일을 치른 뒤에 맛있는 음식으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시대를 초월하는 심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윤석이 평생에 걸쳐 보고 들은 모든 지식을 기록한 백과전서 이재난고일부가 그의 고향인 고창군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대실학자 이재 황윤석이 열 살 때부터 세상을 뜨기 이틀 전까지 53년 동안 온갖 다양한 정보들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입니다. 당시 고창(흥덕)에서 서울까지 67일 걸린 노정(路程: 580)과 여행일지, 경승지나 유적지 등을 돌아본 내용도 있으며,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상주에서 호랑이로 인한 피해 상황과 호랑이 사냥 관련 현상금(큰놈 100, 중간놈 50, 작은놈 30), 하루에 20여 마리를 잡았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는 정읍의 이언복이 60냥에 구입한 자명종을 18세에 구경한 후 1761(영조 37)에 나경적이 제작한 자명종을 직접 봤으며, 1774(영조 50) 염영서를 통해 선급금 5냥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서 황윤석은 이를 수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수리비 4냥을 더 주고 고쳤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 1768(영조 44) 7월에 과거시험을 본 날 점심으로 일행과 냉면을 시켜 먹은 내용, 주막 국밥값 3, 고급 누비솜옷 4, 평민의 누비솜옷 2, 말 한 마리 40냥과 말을 대여할 경우 100리마다 17, 전의현감 월급 15냥 등이 기록돼 있는 등 조선후기 생활문화에 대한 정보들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참봉인 황윤석이 쓴 일기형식의 이재난고를 비롯한 기록을 통해 당시 능참봉의 업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종3품인 능참봉은 부사와도 거리낌 없이 왕능관리 문제를 논했으며 고유제 때 지방관을 헌관으로 직접 차출하는 일도 예사였습니다. ‘나이 70에 능참봉을 했더니 한달에 거동이 스물아홉번이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 능참봉은 역할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원칙적으로 2인이 매월 보름씩 2교대로 재실(齋室)에 기거하며 근무했는데 왕과 왕비의 제례를 관장하고 능을 살피는 봉심(奉審), 능역 내의 수목관리 및 투작(偸斫: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의 감시를 주로 담당했으며 능지 또한 제작했습니다. 정자각, 비각이나 석물을 개수하는 일에 감독을 맡기도 했고 수복(守僕:능침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사람)과 수호군을 살피는 방호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직무특성 때문에 그들은 유학적 지식과 건축, 토목, 조경 등 기술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한 직무능력을 갖춰야만 했습니다.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채용의 형식으로 능참봉을 임용했다는 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가 왕릉 수호라는 상징적 권한 때문에 당대 최고 선호직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경국대전’ ‘봉심규정(奉審規定)’을 통해 능역관리를 체계적으로 수행했으며, 그 중심에는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조선 최고의 왕릉 관리 전문가로서 조선왕릉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오늘까지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능참봉이 있었음을 기억할 만합니다.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수학, 과학, 천문, 지리, 어학, 역법 및 신문물인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백과전서처럼 망라해 다른 일기와 차이가 크며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황윤석은 스물네 살 때부터 마흔여섯 살 때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스물일곱 차례 이상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그는 서른하나에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15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영조 45(1769)에는 성균관 칠일제에서 2등을 하여 국왕을 알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과거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흔 여섯 살이 넘어 결국 과거 응시를 포기했습니다. 조선시대 생원ㆍ진사는 47,000여명으로 연평균 100명가량이며, 문과급제자는 14,600여명으로 연평균 30명 정도였습니다. 이 관문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표시도 나지 않을 만큼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수십 년에 걸친 과거 응시는 그들의 숙명이자 꿈을 위한 끝없는 도전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습니다. 과거제도, 출세의 사다리인가? 배움의 가시밭길인가요? 고창군은 이재난고를 보물로 승격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이재난고가 소중한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승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고 했습니다. 황윤석은 비록 대과에 급제를 하지 못했지만 영·정조시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되어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