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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박영근 묘 및 묘비

 

 

 

 

박영근 묘 및 묘비

전주시 완산구 교동 53-7(?))

전주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 박영근(朴永根)과 그 집안 관련 건물과 비석이 있다. 『조선신사보감』에 따르면 박영근은 1872년생으로, 전주 대화정(大和町), 즉, 지금의 전주 웨딩거리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박영근은 주식회사 전주농공은행장을 역임하고, 전주여자잠업전습소장으로 근무하는 등 전주지역 친일 인물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박영근의 묘 옆에는 ‘관청음밀양박공영근지묘(觀淸音密陽朴公永根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이 외 다른 내용은 새겨져 있지 않아 자세한 건립 경위는 알 수 없다.

박영근 자서비

전주시 완산구 교동 53-7(?)

전주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 박영근(朴永根)의 묘와 함께 자서비가 있다. 박영근 자서비에는 ‘나이 칠십이 되어 세간의 나이를 잊고자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박영근 본인의 칠순을 기념하여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설립연도는 훼손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경진(庚辰)이라는 간기를 보면 1940년으로 추정 가능하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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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진으로 보는 삶과 역사,  동대

동대(東臺), 잊혀진 친일파의 흔적

   “옛 사진 속 문화풍경, 전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고 황면주선생님 전북대박물관에 기증한 사진첩을 꼼꼼히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부랴 부랴 전시회를 개최하고 난 뒤 마땅히 걸어 놓을 공간이 없어 한쪽으로 치워 놓은 사진 2점이 머리 속에 계속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언제 한번 그 곳엘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래도 제법 전주에 대해서는 알만큼 안다고 자부했던 터인지라 생소한 사진 속 풍경이 맘에 걸렸던 것이다. 내
 
 사진을 직접 촬영했던 고 황면주선생님의 사진첩에는 <사진 1>을 “박영근댁 앞 비석, 원래는 창의비였던 것 같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바로 창의비였던 것 같다는 문구에 매력이 끌렸고, 확인이 필요했다.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 이런 건물과 비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기린로가 확장되고 능선 자락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통하는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길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예전에는 승암산 정상에서 발리산-오목대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있었고, 오목대에서 낙수정쪽으로 가는 산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사진 속 건물의 주인인 박영근을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찾아보면, 그는 적어도 전주시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수 있는 친일파였음을 알 수 있다. 

 

 1871년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 68번지에서 태어난 박영근은 주로 금융계통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전주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 전주여자잠업전습소장, 전주농공은행장, 조선총독부 전라북도 도참사, 전주시구 개정위원, 전북경편철도 주식회사 설립위원,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등을 지내었다. ‘관청음(觀淸音)’이라는 자호를 사용한 것 같으며, 남복산인(南福山人)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듯하다.『신사보감』에 기록된 주거지역은 전주군 대화정 1-5번지였다. 지금의 웨딩거리로 도심 한 복판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목대 동쪽편 박영근의 가옥 부근에는 4기의 비석과 석등 부재로 추정되는 기둥이 1점, 박영근의 묘가 있다. 한옥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정면 오른쪽 한칸 바닥면을 높여 전주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사진 1, 사진 3) 인근 주민에 의하면 이곳에서 사람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별장과 같은 성격의 건물이었을 것이라 한다. 박영근은 이곳을 동대(東臺)라 부르고 있다.

 
  4기의 비석은 박영근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새긴 비석이 1기(사진 1), 박영근의 아버지 박한상의 정려비 1기, 박사분과 박한상의 정려비 1기가 건물의 전면과 좌측면에 세워져 있고,  비석을 세운 연유를 밝힌 비 1기와 운문이 새겨진 것을 추정되는 석등 부재가 1기(사진 2)가 건물의 후면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을 지나 낙수정 쪽으로 한 10여미터를 가면 박영근의 묘와 묘비가 있다. 그런데 박영근의 묘비는 백비로 전면에 “관청음밀양박공영근지묘(觀淸音密陽朴公永根之墓)”라 새긴 것 이외에 아무 내용도 새겨 넣지 않았다.(사진 4) 뿐만아니라 정려비 등 모든 비석의 연대 부분이 모두 정으로 쪼아져 있다.

 

향년칠십도은망세지갑자(享年七十圖隱忘世間之甲子):칠십이 되어 세상의 나이를 잊고자 한다

 

자서한 비에 ‘나이 70이 되어 세간의 나이를 잊고자’한다고 자서한 것과 연호는 쪼아졌지만 경진이라 쓰여진 내용으로 보아 박영근이 70이 되던 1940년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곧 무너질 듯 방치된 건물 역시 박영근이 칠순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이후에도 한 동안 그 후손들이 이곳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박한상의 정려비 등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건립 연도가 나오는 간기부분을 모두 정으로 쪼아 놓은 것을 보면 일제시대에 세워진 것임은 분명하며 적어도 194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 세워진 상당수의 비석들은 일본왕(천황)의 연호를 세긴 부분을 전부 쪼아 읽어볼 수 없게 만들었다. 비석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랬는지, 아니면 식민지 지배의 분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지 훼손된 비들이 친일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예외도 없다. 고 황면주선생님이 남긴 한 장의 사진으로 밝혀야 할 친일의 역사가 다시 드러난 것이다. (문화저널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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