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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신시도

군산 신시도가 ‘가을 여행하기 좋은 섬 BEST9’에 선정됐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선유도보다 약 두 배가 크다. 신시도는 과거에 지대가 깊어서 ‘지풍금’, ‘짚은금’, ‘심리(深里)’, ‘신치(新峙)’로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신치가 ‘신시(新侍)’로 바뀐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를 통해 신석기 패총(貝塚, 조개무덤)이 발견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임이 확인됐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1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열도(列島)이다. 1847년 6월 30일, 홍콩에서 출발한 프랑스 군함 2척이 군인 600명을 태우고 신치도(신시도)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김대건과 함께 신부 수업을 위해 마카오로 떠났던 최양업(崔良業, 1821~1861)이 타고 있었다. (......) 프랑스 군함이 600명이나 되는 군인을 태우고 온 것은 조선에서 만족할 만한 회답을 주지 않으면 상륙전을 펴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군함들이 신치도의 벌 속에 박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데다가 배의 틈 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그 사이 군함은 완전히 부서졌고, 그들은 부서진 조각을 모아 작은 배를 만들어 상해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전라감사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들이 온 이유를 밝히고 양식과 선박을 제공해 달라고 했다.

이에 전라감사 홍희석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중앙에 보고하는 한편 주변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이때 최양업은 신분은 숨기고 필담에 나서 천주교 선교의 자유 등을 요구한 바, 전라감사는 약속에 따라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생필품과 큰 배 4척을 준비했다. 8월 5일, 프랑스 해군 대령 라피에르는 이곳을 떠나면서 자명종과 거울 한 개를 전라감사에게 예물로 전달했다.

신치도가 신시도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신시도는 고군산도의 일개 섬이었을 때에도, 이 이름이 독자적으로 불렸을 때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해상 교통로인 셈이다. 신시도는 낚시 등 어촌 체험 활동이 제공되는 민박 패키지가 있어 한 번에 예약이 가능하다. 물 때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 전통방식의 ‘개막이 체험’을 주민들이 직접 개발하면서 ‘바지락 캐기’와 함께 특화된 관광체험을 즐길 수 있다. 올부터 새만금 방조제-신시도-선유도-무녀도로 연결되는 국도가 부분 개설, 개통됨에 따라 신시도를 좀 더 쉽게 찾아 올 수 있어 관광객 증가가 기대된다. 서해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신시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