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 2건을 각각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1,500여 년 전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喪葬禮) 문화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둘 다 각각 한 쌍으로 출토된 이들 금동신발들은 모두 백제 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삼국 시대 고분 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보기 드문 사례다. 그동안 삼국 시대 고분 출토 유물 중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되었지만,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까지 마한 백제권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성 요리, 원주 법천리, 공주 송산리, 공주 수촌리 등지에서 출토된 모두 19점이 알려져 있다.
△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2종은 국내 최초 원형 그대로 발굴된 유물이라는 점에서 고고학과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또한, 같은 시기 중국이나 고구려, 신라의 미술품과 비교하여 문양의 기원과 변천, 상징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 시대 금동신발과 비교하여 백제 공예문화의 독자성을 밝힐 수 있는 원천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금동신발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 시대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고대 금속공예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의 고분에서는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高敞 鳳德里 一號墳 出土 金銅飾履)’은 고창 봉덕리에 위치한 4기의 대형 분구묘(墳丘墓, 분구를 조성한 다음 그 안에 매장시설을 설치하는 무덤양식) 중 규모가 가장 큰 1호분의 제4호 석실에서 200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했다. 4호 석실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여기에서 금동신발 한 쌍이 무덤 주인공의 양쪽 발에 신겨져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장례 때 의례용으로 사용된 신발로서 백제 시대의 전형적인 형태와 문양을 보여주는 금속공예품이다.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현재까지 삼국 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약 19점의 금동신발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이며,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비교했을 때 어자무늬(魚子文, 물고기 알 문양) 등 삼국 시대 초기 문양이 확인되어 시기적으로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바닥판과 좌우측판, 발목깃판으로 구성되고 바닥에 징(스파이크)를 박은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 백제의 중앙 권력자가 제작해 왕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지방 유력 지배층에게 내려준 ‘위세품(威勢品)’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백제 시대 의례용 금동신발로서, 보기 드물게 원형을 갖추어 출토된 중요한 고대 금속공예품이자, 다양하고 뛰어난 공예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5세기 중반 백제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羅州 丁村古墳 出土 金銅飾履)’은 삼국 시대 대형 분구묘인 정촌고분의 1호 석실에서 2014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것이다.
1500년 전 망자(亡者)의 넋이 무사히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랐을까. 발등 끝에 부착된 용(龍)머리 장식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비상할 듯 날렵하게 솟아있다.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복암리고분군, 정촌고분, 영동리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됐다. 그 중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마한 문화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이면서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아 매장의 원형을 알 수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덤이다.
정촌고분 1호 석실 제3목관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좌우 신발 한 쌍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되었으며, 특히, 발등 부분에 부착된 용머리 장식은 현존 삼국시대 금동신발 중 유일한 사례로 주목을 받아 왔다. 최근에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수행한 과학적 분석 결과, 신발의 주인공이 40대 여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이 금동신발은 형태와 제작기법, 문양 등에서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과 매우 유사하다. 얇은 금동판 4장으로 바닥판과 좌우 옆면판, 발목깃판을 만들어 서로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고 문양을 투각해 세부를 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 고대 금속공예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육각문, 용문, 인면조신(人面鳥身), 괴수문, 연화문 등 사후영생(死後永生)을 기원한 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이 반영된 듯한 다양한 문양이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형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에 비해 조금 늦은 5세기 후반 경에 제작되어 6세기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공예품으로서, 5~6세기 백제의 사상과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 익산 입점리 고분군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
1500년만에 잠에서 깨어나 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지난해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새롭게 전시됨에 따라 관심을 끌고 있다. 익산 입점리 고분은 지난 1986년 익산시 웅포면 등에서 마을 학생들이 우연히 발견한 무덤 떼로 21기에 달하는 고분이 금강변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백제 양식 무덤인 굴식 돌방무덤이 이곳에 만들어진 시기는 한성기 말에서 웅진기 초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며 금강하구까지 뻗어 나갔던 영향력을 읽을 수 있다.
금동신발은 바닥에 스파이크와 같은 돌출된 장식과 마름모꼴무늬 속 세 잎 무늬, 얇은 금동 판을 다루는 기술에서 당시 발달한 금속공예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과학적 분석 결과 , 99% 안팎의 순금에 가까운 금을 합금재료로 사용함에 따라 백제에서 고순도의 금을 분리하는 제련과 정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동관은 나뭇가지 모양 장식 파편 3점과 띠 모양 관테 파편 10여 점이, 고깔 모양 관은 물고기 비늘무늬 금판과 대롱 장식, 그 밖에도 봉황·연꽃무늬 세움 관장식 수 점이 눈길을 끈다. 금동관과 신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출토됐다.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나주 신촌리 등지와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품들은 주변 지역까지 미쳤던 백제의 정치적 위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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