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일환 교수의 한국문학의 원천, 전북문학의 미학
1. 연재를 시작하며
전북문학의 어제와 오늘 문학적 현실 바탕 재조명 / 도민 문화 긍지 회복 기대
전북을 예향이라고 한다. 판소리의 꽃을 피우고, 서화가 발달했으며, 출판문화를 융성시킨 곳이 전북이다. 특히 문학적으로 전북은 전국을 호령했다. 문화 르네상스를 열었던 백제 고가에서부터 조선시대 가사문학,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북과 전북 문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일보는 전북을 배경으로, 혹은 전북 문인들에 의해 한국문학이 어떻게 발달하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전북문학의 어제와 오늘을 통해 전북인들의 문화적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취지다. 국문학자인 전일환 전주대 명예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전북은 지리적으로 옛 백제권역이었고,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전남북과 제주를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전북은 동부산악의 임산물권과 광활한 서부호남평야의 농산물권, 서해안의 해산물권의 3요소가 어우러진 풍성하고도 완전한 삶터였다. 지명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거의 완전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여 '온다라', '온드르'(온들의 옛음)라 불러오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완산(完山), 전주(全州)라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예로부터 삼국 가운데 가장 찬란한 백제문화를 창달해 왔고, 문학과 예술면에서도 우리나라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고려사' 악지 권 24 백제 조에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 등 백제오가(百濟五歌)가 노래의 내용만을 담은 채,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전북의 문학 작품으로 정읍의 정읍사, 고창의 선운산가, 남원의 지리산가가 있고, 기타 장성의 방등산가도 정읍권의 시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정읍사와 더불어 선운산가나 지리산가, 방등산가 등은 망부가(望夫歌)류로 아름다운 여성의 정절을 주제로 형상화된 작품들이다. 이중 '정읍사'는 유일하게 연행(演行)형식과 더불어 그 가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져 백제가요의 원형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들 대부분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정조(情調)를 바탕으로 여성의 정절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남원을 배경으로 한 판소리계소설인 '춘향전'을 낳은 철학적 배경이 되었다. 세조대엔 고려조 가전체 소설을 이어받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같은 몽유록계 산문문학이 남원에서 배태되면서 남원 인월면과 아영면을 배경으로 한 '흥부전'과 만복사 동쪽에 살았다는 최척을 주인공으로 한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 전북 완주 이서면이 배경이 된 '콩쥐팥쥐전' 같은 산문문학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고종조 이규보는 32세 때 전주목에 부임한 후 전주의 속현들을 둘러보며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적 수필을 남겼고, 전북의 경물을 읊은 60 여수의 유려한 작품이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전한다.
조선 성종조 정극인은 정읍 칠보를 배경으로 한 가사의 효시작 '상춘곡', 단가 '불우헌가', 경기체가 '불우헌곡'을 창작하였다. '상춘곡'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미학 속에 조선조 사대부들의 유교적 스토우어시즘(stoicism)의 풍류를 엿볼 수가 있고, 단가형의 '불우헌가'는 돈독한 군신간의 윤리와 철학이 담겨있다. 경기체가형의 '불우헌곡'은 전원생활의 흥취와 후진교육의 즐거움, 벼슬세계에서 자신의 진퇴와 성은(聖恩) 등을 읊었는데, 이 둘의 장단가가 한데 어우러진 작자의 철학과 풍류가 '상춘곡'에서 종합되어 드러난다.
이들 작품은 정극인을 흠모하고 사숙(私塾)했던 면앙정 송순에게 이어져 가사 '면앙정가'를 낳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짐으로써 호남가단을 이루어 조선가사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장수출신 장현경은 정조 20년에 삼례역승으로 좌천되자, 정철의 사미인곡처럼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군류의 가사 '사미인가'를 창작하였다. 그리고 완주 봉동의 규방가사 '홍규권장가'와 '상사별곡', 고창군 대산면의 '치산가'로 이어지면서 고종조 진안 마령의 이도복이 마이산 구곡의 절경을 노래한 '이산구곡가'에 이르렀다.
선조대에 부안에서 태어난 매창은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에서 쌍벽을 이룰 만큼 시재(詩才)가 출중한 여류시인으로 많은 시조와 한시작품을 남겼고, 광해조에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장복겸은 영천을 배경으로 한 연시조 10수의 '고산별곡'을 창작하였다. 신말주의 11대손 신경준은 영조년간 '산수경', '훈민정음운해' 등 많은 저술을 하였고, 정격의 한시작법에서 벗어난 '시칙(詩則)'의 시론에 입각하여 65수의 작품을 남겼다. 영조대 동년월일에 남원에서 태어나 18세에 결혼한 담락당 하립과 김삼의당이 10년의 이별과 해후 속에 남긴 '김삼의당시문집' 200여수의 한시는 춘향전과 더불어 전북여성의 아름다운 정절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전북 고창의 신재효는 판소리 12마당을 6마당으로 개작하여 판소리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가람 이병기는 현대시조는 전통적인 틀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시조혁신론을 제기하여 현대시조시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이와 같은 문학적 현실을 바탕으로 전북문학의 문학적 공과(公課)를 조명해 봄으로써 전북문학이 한국문학의 원천이요, 남상(濫觴)이었음을 밝히려 한다. 미래사회는 물질보다 인간 중심의 정신문화가 주도해나갈 것이라는 이 시대에 갈수록 소외되고 저열감이 짙어져가는 우리 전북인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고 문화적 자존감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일말의 바람으로 이 담론을 시작코자 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 전일환 교수는 전주대 부총장과 전국대학 부총장회 부회장을 지냈다. 국어문학회장·한국언어문학회, 베이징 어언문화대학 한국어과 초빙교수 및 베이징 한글학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가사문학론' '고전시가선독' '우리 옛가사문학의 이해' '옛시 옛노래의 이해' '옛수필산책' '난세의 정치철학 맹자'과, 수필집'그말 한마디' '예전엔 정말 왜 몰랐을까' 등을 냈다.
기고 | 전북일보 desk@jjan.kr 2013.10.09 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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