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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반계 유형원을 배향한 동림서원 ‘동림서원지’ 발견

반계 유형원을 배향한 동림서원 동림서원지발견

 

반계 유형원(16221673) 을 배향한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동림서원지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와 함께 재임안(齋任案)', ‘서재유생안(西齋儒生案)', '양사재계안(養士齋契案)'등도 새로 찾아내 19세기 동림서원의 양상을 찾을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김승대 전북도청 학예연구관은 20201023일 부안군, 한국실학학회, 실학박물관이 주최한 반계 유형원 국제학술대회에서 부안 동림서원의 연혁과 변천에 연구 -동림서원지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 부안김씨 담계 종중에서 '동림서원지' 등 고문서 4건을 발굴했다.

동림서원 문서로 '재임안'1836~1849년까지의 7회에 걸친 임원 명부이고, '서재유생안'1845년이 서재 유생 명단 16명을 알 수 있다.

'양사재계안'1862년 동림서원 양사재 중창 수계안으로 유생들이 면학을 뒷받침하는 후원 역할로 재력을 갖추고 계를 운영하고자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96명의 계원 명단은 부안지역 사족과 성씨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지역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동림서원은 반계 유형원을 배향한 유일한 서원이었다. 현재 주춧돌과 기념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동림서원의 옛 터는 부안군 우반동으로 가는 길, 오른쪽 가오리 원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동림서원은 반계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1693년에 그를 배향한 반계사(磻溪祠)’라는 사우(祠宇)에서 출발했다. '연려실기술'에 보면 파산서원(巴山書院)’이란 명칭도 쓰고 있다. 이후 반계를 비롯, 유문원(柳文遠), 김서경(金瑞慶), 김회신(金懷愼)이 추가 배향되어 운영되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한편 부안문화원은 추후 '반계 유형원과 부안(가제)'을 발간할 계획이다.

 

유형원을 만나 볼 수 있게 하는 동림서원지

 

최근들어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저술하며 국가 개혁을 꿈꾸었던 부안 우반동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반계가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활동에 매진한 학문의 현장으로서 우반동과 삶의 현장으로서의 부안 지역은 반계학연구의 시작점이라고 할 터이다.

부안지역에는 우반동의 반계 집터, 반계 서당, 그의 농장터 등 반계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최근에는 반계의 후학들과 그가 교유했던 호남지식인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김승대 전북도청 학예연구관은 반계 사후 반계 배향의 중심지였던 동림서원(東林書院)의 유적과 그 연혁에 대한 궁금증이 자못 컸다.

동림서원은 반계 유형원을 배향한 유일한 서원이었다. 현재 주춧돌과 기념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동림서원의 옛 터는 부안군 상서면 소재지에서 우반동으로 가는 길, 오른쪽 가오리 원촌마을에 위치한다. 동림서원은 반계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1693(숙종 19)에 반계를 배향한 반계사(磻溪祠)’라는 사우(祠宇)에서 출발했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파선서원(巴山書院)’이란 명칭도 쓰고 있다. 이후 반계를 비롯, 유문원(柳文遠), 김서경(金瑞慶), 김회진(金懷愼)이 추가 배향돼 운영되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김박사는 최근들어 부안김씨 담계 종중에서 '동림서원지' 등 고문서 4건을 발굴함에 따라 동림서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특히, '동림서원지'에는 서원의 건립과 변천을 알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재임안', '서재 유생안', '양사재 계안'19세기 동림서원의 양상에 대한 내용으로 향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동림서원지'48면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표지에 동림서원지(東林書院本誌)’라 기재되어 있고, 첫장에는 부안동림서원본지(扶安東林書院本誌)’라고 시작하고 있다. 내용은 서원본지(書院本誌)’제선생핵적(諸先生行績)’으로 구분된다. ‘서원본지(書院本誌)’3면으로 소략하지만, 동림서원의 건립과 이건, 강당 창건, 배향인물의 향사 위차(位次)가 자세히 실려 있어 서원의 건립연혁과 관련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재임안은 1836(헌종 2)부터 1849(헌종 15)까지 동림서원에서 작성한 서원 재임(齋任)들의 명단이다. 丙申 1836(헌종 2), 戊戌 1838(헌종 4), 壬寅 1842(헌종 8), 癸卯 1843(헌종 9), 乙巳 1845(헌종 11), 丙午 1846(헌종 12), 丁未 1847(헌종 13), 戊申 1848(헌종 14)7회에 걸쳐 기재되어 있다.

서재유생안은 1845(헌종 11) 8월에 부안 동림서원에서 작성했다. 명부의 끝에는 ‘(을사팔월 )乙巳八月 () 재임(齋任) ()’ 등 작성년대와 당시 재임을 맡았던 사람의 성씨와 수결(手決)이 적혀 있다. 부안현감이 날인한 관인이 찍혀 있어 공적인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이 유생안을 통해서 당대 부안지역의 재지사족과 성씨 등 다양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 평가된다.

양사재 계안은 1862(철종 13) 동림서원에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양사재의 계안이다. 표지에 壬戌十月晦日이 부기되어 있어 186210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서문은 이관술(李觀述)이 작성했다. 이관술은 당시 55(1808년생) 나이의 진사로 확인된다. 이관술은 동림서원의 양사재가 많은 선비를 길렀으며, 더욱 문학에 정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30냥을 거출해 계를 만들어 유생들의 면학에 뒷받침을 하고자 하는 계획도 피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발굴된 '동림서원지'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김연구관의 설명이다. 먼저, 이를 위해서는 490면으로 된 이 고문서에 대한 번역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반계와 반계의 문인, 교유인물로 확인되는 반계학단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부안지역 등 관련 문헌의 심층 조사, 유적 조사 등이 가일층 요망된다고 했다.

둘째, 반계사와 파산서원에 대한 위치 비정과 유적 조사가 필요하다. 1693(숙종 19)에 건립된 반계 사당인 반계사는 일명 파산서원으로 불렸다. 반계의 고제인 유문원이 살았던 사산마을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당시 기사환국 직후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반계사는 사림들의 반계 배향의 중심공간이었다.

셋째, 동림서원 관련 본격적인 고증 연구가 절실하다. '부안군지'(1991)에는 동림서원과 관련된 고문서가 이번에 발굴된 사료 이외에 심원록(정유 3), 담계선생유고, 열휴당유고, 담계가장, 성학십도, 담계선생문집, 담계선생묘갈 등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관련 고문서를 시급히 찾는 작업이 요청된다. 또한 이러한 심층적인 문헌 고증조사와 아울러 현 동림서원터에 대한 발굴조사도 필요하다.

넷째, 동림서원의 가치 활용방안에 대한 검토이다. 부안은 반계와 관련된 선명한 유적지로 우반동의 반계서당(반계유적지, 전북 기념물 제22), 반계고택지가 있으며, 동림마을의 동림서원지, 문인 김서경 묘소 등이 있다. 또한 반계와 교유한 사산마을 송시추 묘소, 석동산 자락에 나용보 묘소 등이 있으며, 반계 소유의 상서농장터, 동진농장터 등도 확인되고 있다.

김연구관은 "우반동 전체는 반계의 삶의 공간이고, 변산은 반계의 휴식 공간으로서 훌륭한 문화자산이다면서 특히, '반계유고'에는 우반동, 변산에서 읊은 시귀와 송시추, 나용보, 권극중 등과 교유했던 시귀 등도 확인되고 있는 바 바로 이같은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부안의 반계길’, 반계 유적지 답사 등 사료와 문화유적을 연계한 가치 활용을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