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지역은 14세기에 들어와 왜구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元)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 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南朝)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 세력들이 해적화해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했다.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이다. 14세기에 들어와 군산도를 포함한 군산 지역은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왜구의 침입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14세기에 들어와 침입의 빈도와 그 규모가 커졌다. 1323년 6월 왜구는 군산도에 침입하여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하여 조세미를 약탈해갔다. 특히 1380년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임피의 진성창(鎭城倉)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무려 10,000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함포 사격을 통해 궤멸시키니, 이것이 진포대첩이다. 진포대첩 이후에도 군산 주변에서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고, 1382년에 해도 원수 정지 장군이 50척의 배로 진포에 침입해오자 군산도까지 추격선을 보내 4척의 배를 나포하기도 했다. 이어 1406년에는 남번(南番)의 조와국[자바]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 군산도에 이르러 왜구에 약탈당하기도 하는 등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군산 지역에서 나타났다.
세종때의 기사가 2건이나 보인다.
세종 8년(1426년) 4월 4일(丁卯) 3번째 기사는 경계 근무를 소홀히 한 검모포(黔毛浦, 곰소항) 천호 조공영과 군산 부만호 조마 등을 추궁해 죄의 실상을 조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병조에서도 전라도 수군 처치사(광역의 병력을 총괄하는 무관)의 보고에 이뢰기를, “도내의 김제군 사람 이산(李山) 등 7명의 작은 배를 타고 만경현 경내 바다 가운데의 양초(陽草)에서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왜적을 만나서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어 도망해왔다. 또 만경현 사람 김지(金知), 송민(宋敏) 등 9명이 배를 타고 위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왜적의 매를 만나 4명은 살해를 당하고, 5명은 도망해왔다. 검모포(黔毛浦, 곰소항) 천호 조공영과 군산 부만호 조마 등은 봉화로 바다를 망보는 것을 잘 단속하지 못해 적이 와도 즉시 쫓아가서 잡지 못하고 오히려 관내의 사람들을 살해당하게 했으며,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민서각(閔犀角)과 만경현령 김자(金滋)는 경내의 인민이 무리를 지어 바다로 나갔지만 살피지 못해 공문을 보내어 이를 알린다’
같은해 4월 22일 8번째 기사는 군산 서면에서 왜선을 공격해 물리친 것을 농공행상하게 한 내용으로 돼 있다. ‘전라도 수군처치사 박실(朴實)이 아뢰기를, “왜선 1척이 3월 20일 부안현 위도에서, 25일에는 만경현 양초에서 고기잡는 사람들을 노략질하므로 신이 즉시 호군(護軍) 이광경(李光敬)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이를 뒤쫓게 해 4월 16일에 군산의 서면(西面)에서 쳐서 17급을 베고 병장기와 의복을 빼앗았다. 지금 광경을 보내어 수급을 바치오니 옷 두 벌을 내리소서” 하니 병조에 명해 공을 농해 상을 주게 하고, 드디어 이조정랑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옷 한 벌과 선온(술) 160병을 박실에게 내리게 하고, 아울러 종서에게 명해 처치사와 더불어 왜적을 잡은 공로를 등급지어 아뢰게 했다.
왜구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되었으며, 정치적으로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遷都論)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의 약탈은 국가 재정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에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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