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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포쇄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사초의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편찬 당사자들도 사초나 실록의 내용에 대한 기밀 유지와 공정하고 정직한 직필의 의무가 강조됐다. 완성된 실록은 특별히 건축 관리되는 사고(史庫)에 놓았다. 보관된 실록은 3년에 한번씩 꺼내어 '포쇄(暴灑)'를 했다. ‘포쇄’란 습기를 제거해 충해를 막을 수 있도록 책을 말리는 것을 말한다. 조선조에는 장마철을 피하고 봄이나 가을의 맑은 날을 택해 책에 바람을 쐬고 햇볕에 말리는 포쇄를 3년 혹은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이때에도 전임 사관 1인이 파견돼 일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했다. 이 포쇄의 과정에서도 실록의 내용이 공개되거나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1473년 8월 26일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전주의 새로 만든 사고(史庫)에 전후 실록을 지금 모두 옮겨 놓도록 하소서. 무릇 지방 사고는 늘 3년마다 한 번씩 바람을 쐬고 볕에 말리는 포쇄함이 상례입니다. 매년 장마철에 비가 샐까 염려되니, '사궤'는 열고 닫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비가 새는 곳은 그 도(道)의 감사로 하여금 매년 장마가 끝난 뒤 살피어 계문하도록 하소서”하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1474년 8월 13일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금년은 외사(外史)의 포쇄에 당하였으니 기사관 강거효를 성주에, 안팽명을 충주에, 표연말을 전주에 파견하게 하소서”하니, 성종이 승정원에 묻기를, “한림(翰林)만 파견할 수 있고 5, 6품 사관(史官)은 파견할 수 없는가?” 했다. 이에 승지들이 아뢰기를, “구례(舊例)에는 한림을 파견하였으나 춘추관에 벼슬을 띤 자는 비록 한림이 아니더라도 파견할 수 있습니다”하니, 성종이 명하여 수찬 이명숭(李命崇)을 성주에, 교리 최한정(崔漢禎)을 충주에, 응교 이맹현(李孟賢)을 전주에 파견하게 했다.
 사고(史庫)의 실록 선원각(璿源閣)을 포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담당하는 포쇄별감이 춘추관에 설치됐고, 포쇄 때마다 일지를 썼을 정도로 중요한 행사의 하나다. 박정향은 1871년 별검춘추(別檢春秋, 사관 역임자 중 청요직에 있는 자 가운데서 특별히 선임하는 직)로 무주 적상산사고와 태백산사고 포쇄를 수행한 자로, 포쇄사관 선임, 사관일행 구성, 인원 및 장소, 소요 물품, 절차 및 방법 등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전주는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왕실 기록을 지켜낸 역사의 도시이자, 감영목판이나 한글고전소설 등 완판본을 찍어낸 출판의 도시이다. '포쇄' 행사가 전주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자리매김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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