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진돈편액

정읍 후송정

 

 

 

 

 

 

 

 

 후송정은 정읍 칠보 무성서원 초입인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불우헌 정극인신도비를 지나 작은 물길을 따라 가면 성황산 밑 송정 아래에 있다.  주변에는 무성서원을 비로소해서 송정과 영모당, 시산사와 필양사 그리고 한정, 호호정터, 정극이생가터 등이 있다.
 맞은편 마을인 동편에는 고현향약을 운용했던 동각이 있으며 도봉사에는 김회련개국공신록권(보물)이 보관되어 있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또 바로 개울건너 송산에는 고운 최치원이 검단선사 및 유생들과 유상곡수를 즐겼던 유상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석지 채용신이 그린 송정십현도를 보면 칠보 성황산을 주변으로 동진강과 주변 시산마을 안에 있는 문화유적이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보면 후송정 아래에는 작은 호수가 있고 그곳에는 뱃놀이에 사용한 작은 배가 놓여 있다. 또 송산에서 여러 선비들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토론하는 사람들도 그려져 있고, 뒷산인 성황산에는 노송이 자태를 뽐내고 있어 절경을 이룬다.
 후송정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송정과 영모당 그리고 시산사에 다다른다.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좌우에 노송과 잡목 그리고 신우대가 자라고 있으며, 특히 키가 큰 낙낙장송은 정자와 어울리고 발아래는 여러 풍광이 한 눈에 펼쳐진다.
  현재 후송정은 1898년에 세운 것을 1985년에 다시 중건했으며 암반위에 둥근돌기둥을 올린 다음 사각기둥을 놓고 기와를 올린 것은 비슷하다. 정자 안에는 기해년에 김사겸이 쓴 후송정기문과 몇 점의 편액이 있고, 김곤이 행서로 쓴 후송정편액이 걸려있다. 이 정자에 오르면 건축구조의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먹골에서 산허리를 감싸면서 불어오는 솔바람은 심신을 정화하는데 최고의 선물이 된다. 
 후송정기를 보면 고종(광무3년) 때인 1899년에 김직술이 송정의 10현(賢)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십송정이라 불렀고, 이후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짐을 안다)의 의미에서, 즉 절개가 높은 선비의 고결한 뜻을 기리고자 정자 이름을 후송정이라 개명했던 것이다.
 후송정 정지(亭誌)실기를 보면 1898년 송정 위에 영당을 세우고 채용신이 그린 칠광도와 십현도를 봉안한 후 작헌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하고 후송정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백일장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송정 위 영모당은 후송정보다 한 달 앞서 지어졌고, 이 공간들은 조선후기 칠보의 전통문화인 향음주례와 백일장이 시행된 장소라는 의미에서 아주 역사성을 갖고 있다.
 정자 옆 암벽에는 간재 전우가 후송(後松)이라 쓴 암각서가 보인다. 서체는 행서이며 글자의 크기는 약 50㎝정도가 되는데 그의 능숙한 필획이 잘 나타나 있다. 암각서 옆에는 정사(1917)년에 이재우가 지은 후송정 42원비(四十二員碑)와 1966년에 도강 김인기가 지은 후송정중수기가 세워져 있어 후송정의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후송정중수기의 내용 중에 후송정 옆 암각서가 간재 전우의 글씨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의 친서로 석벽에 후송정(後松亭)이라 제서하고 경향의 문인(文人)과 달사(達士)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춘추로 담론하고 시를 읊으니 문풍(文風)이 빛나 뒤를 이어 크게 후생의 준칙이 되었다. 이로부터 풍조가 변혁된 후로 그 풍화(風化)가 떨치지 아니하여 정자 또한 썩어 부서져 길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였다. 

 근방에 사는 자손들은 선철(先哲)의 유풍 더욱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김영득(金榮得), 양재근(梁在根), 송병호(宋丙浩)로 하여금 유사(有司)로 정하고 각각 비용을 갹출하여 증수하였다. 그 후 여러 사람이 상의하여 영구유지책(永久維持策)을 하고자 했다. 자손이 각처에 흩어져 살음으로 서로 소원(疏遠)하니 누구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알 수 없으므로 기왕의 십철(十哲)의 구비(舊碑)의 성휘(姓諱) 아래에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의 손자라 쓰고 후일에 잊지 않고 서로 찾는 데는 비(碑)에 새겨 그 곁에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부합되었으나 재정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리 저리 미루고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다행히 송영옥(宋榮玉), 김동옥(金東玉), 김동기(金東基)의 삼군(三君)이 이 정자에 오르더니 탄식하며 특별하고 돈독한 도움으로 이에 한 돌로 비를 정자의 뜰에 세우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오직 자손가의 영구히 잊지 않고자 함과 도리어 또한 올라가 본 이의 감상의 발함이 있었음이다. (생략)

 위의 내용을 보면 선현들의 유풍을 이어가기 위하여 퇴락한 정자를 다시 수리하고 뜻을 모아 작은 빗돌에 기록함을 보았다. 만약 빗돌이 없고 정자만 남아 있다면 어느 누가 옛 사실을 대변해 줄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새삼 금석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후정송이 있는 원촌마을은 선비의 고장으로 전국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정자와 서원 그리고 사우가 있다. 이곳에 가면 최치원의 문향과 체취, 정극인의 '상춘곡' 가사, 많은 애국지사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공: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


 

'김진돈편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실 영벽정  (0) 2013.08.12
칠보의 감운정  (0) 2013.07.29
순창의 낙덕정  (0) 2013.07.01
임실 풍욕정 편액  (0) 2013.06.17
장수심원정의 편액  (0) 2013.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