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지 않는 곳의 시간은 켜켜이 먼지를 쌓고, 그 곳의 겨울은 발자국 하나 없는 눈을 남긴다. 채석장과 염전, 폐철로… 우리에겐 이 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많았다. 근대의 시간과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과거의 영광을 깊은 곳에 품고 있던 그 곳들... 그렇게 하얗게 낡아가던 근대의 건축물이 다시 시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옛 기억 속에 버려진 공간들, 이제 그들이 한국의 오르세 미술관을 꿈꾼다.
보존의 극대화, 신축의 최소화 – 근대와 현대의 소통
근대 개항의 중심이었던 인천. 인천은 한 때 그렇게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다. 신 문물과 기존의 역사가 치열하게 맞부딪혀 가던 이 곳. 하지만 그 역동성의 역사를 안은 인천은 근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인천이 다시금 속 깊이 품었던 역동성을 조금씩 되살리고 있다.
처음 가본 인천역 앞은 중국어 간판들이 즐비했다. 유난히 선명하게 붉은 차이나타운 끄트머리쯤에서 한 건물에 ‘대한통운’이라는 빛 바랜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의 강렬한 빨간 색들에 비하면 차분하리만치 평범한 적색 벽돌건물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제서야 ‘인천아트플랫폼’이란 표지가 눈에 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 중구 해안동 일대의 근대 개항기와 1930~40년대에 건설된 건축물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근대건축물에 신축건물을 덧붙여 재 탄생된 곳으로, 근대건축기술을 보존함과 동시에 창작스튜디오, 아카이브,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치열했던 그 시절의 그 역사를 고스란히 품었던 그 곳이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문화를 전하기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 곳 건축 디자인의 컨셉은 비움과 채움, 기억과 향유, 소통이에요. 건물 사이에 회랑과 오버브릿지를 설치하여 모든 단지를 연결시키고, 공간이 순환하도록 했죠. 또 건물 곳곳에서는 근대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으면서도, 몇몇 공간에는 유리를 덧대어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했어요.”
건물 컨셉의 안내를 따라 다시 인천아트플랫폼을 둘러 본다. 건물에 빙 둘러싸인 가로 구획 양 옆으로 잘 정비된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있다. 마치 하나의 작은 시내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단지 자체가 외부와 뚫려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인천아트플랫폼의 근대건축들은 현대와, 도시와 묘하게 소통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근대와 현대의 접점이 바로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듯 한 느낌이다.
방방곡곡 산업유산의 화려한 변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비단 인천의 전유물 만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근대산업유산들이 문화공간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작년부터 문화예술 창작벨트라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전국 곳곳의 버려진 산업유산을 예술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기지 하에 1년간의 준비 조사와 연구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착공에 돌입했다. 전북 군산시의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 충남 아산시의 도고온천역 폐철로 일대, 전남 신안군의 증도 태평염전, 대구의 옛 연초제조창, 경기 포천시의 폐채석장 등 총 다섯 개 지역의 근대의 공간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었던 군산은 현재 방치되어 있는 개항기의 건축물들을 보존 정비해 역사문화공간으로 되살리고 있다. 옛 조선은행 건물은 군산의 근대 산업기술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나가사키 18은행은 시민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소규모 갤러리와 역사문화 홍보관으로, 대한통운 창고건물은 복합 창작 및 공연 공간으로, 미즈상사 건물은 문학예술 고서적 전시 및 체험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신안면의 태평염전 일대는 특색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뀐다. 소금창고를 리모델링하여 염전 체험공간으로 꾸미는 등 소금과 염전을 테마로 한 에코문화예술 공간으로 조성한다. 또 아산시는 장항선이 폐철되며 그 기능을 상실한 도고온천역을 창작 레지던스 공간으로 만들고, 폐교를 공연 창작 스튜디오로 활용하는 동시에 농협 창고를 공연예술 극장과 카페로 바꾸어 근대의 추억을 담는 문화예술벨트를 만들고 있다.
대구 연초제조창는 대구지역 문화예술창작 발전소로의 준비가 한창이다. 이미 다양한 전시회가 열렸으며, 현재 레지던스 창작 공간 조성과 관련 프로그램 개발이 진행 중이다. 포천의 폐채석장은 이미 작년 말 문화 공간으로의 변신을 마쳤다.
1995년, 폭발음과 함께 시행된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는 큰 이슈였다. 과거의 쓰라렸던 기록과 한 시절을 대표하는 상징 건물이 그렇게 스러졌다. 역사적 기록과 건축양식의 보존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오르내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지난 시절의 상징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기를 원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이루어지는 근대건축물 재생은 문화가치의 보존에 대한 달라진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근대기의 역사문화 흔적이 현재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 420억 원에 달하는 예산 지원과 더불어 올해 안에 5곳을 추가로 선정할 예정이다. 지난 시간을 해체하고 부정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 세월을 받아들이고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것이다. 과거가 없으는 현재도 있을 수 없는 것.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대적이었던 그 시절의 치열함을, 그리고 공간들을 현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우리는 그렇게 밟아나가고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외국의 사례들
선진국의 경우 이미 산업의 유산을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바꾸는 일은 허다하다. 기차역에서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거듭난 오르세 미술관이나 흉물스런 맥주공장을 유리 공예품과의 조화를 통해 문화관광명소로 바꾼 삿포로 팩토리가 그 예이다. 또 환경 오염 문제로 방치된 발전소가 1999년 현대미술 갤러리로 전환된 런던의 테이트 모던은 현재 템스강변의 문화거점으로 자리잡았으며, 독일의 뒤스부르크 티센 제철소나 에센 광산 역시 가동 중단된 지역의 애물단지에서 대표적 문화지대로서 지역 재생에 기여했다. 특히 에센 광산은 디자인 박물관과 디자인 학교까지 들어서면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새로 지어 올라가는 건물들이 아닌, 내가 보지 못한 많은 역사의 숨결을 켜켜이 쌓아 올린 이 건물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모던함으로 치장된 세련된 공간 보다 좀 더 매력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 숨결 덕분에, 새롭게 변신한 이 근대의 건축물들은 사람들에게 더 남다른 의미로 다가간다.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근대산업유산의 재생 사업은 건축물의 문화적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의 문화예술을 소생시키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체계적인 기획을 통해 문화공간으로서의 내실을 다질 때, 단순한 지역 관광물의 조성을 넘어서는 방방곳곳 문화예술공간의 탄생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장윤경(문화체육관광부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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