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6월 30일까지 고고관 신라실에서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문자(文字)'를 갖는다.
이번 전시회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호), 임신서기석(보물 1141호), 남산신성비 제2비 등 30여 점이 전시된다.
신라만의 화려한 황금 유물이 우리를 ‘고분의 나라, 신라’로 이끌었고, 이에 더 나아가 신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일통삼한을 이루어 나가는 6~7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신라의 ‘문자’자료를 중심으로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문자(文字)'테마전을 개최하게 된 것.
신라는 6세기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문자 사용이 증가하여 문자 발달사상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는 6세기대에 이르러 무엇인가 많은 내용의 사실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신라 사회에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신라는 눈부신 발전을 해 나갔는데, 우경(牛耕)의 실시를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체제의 정비를 구체화하였고, ‘왕’이라는 호칭과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확정했다.
율령의 반포·불교의 공인(公認), 영토의 확장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친 질적 변화가 뚜렷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뿐만 아니라, 역사학의 문헌 연구를 통해서도 6세기대 신라에 대한 매우 많은 연구 성과가 제시되고 있는 데 그만큼 이 때가 신라에서 중요한 시기임을 반증하며, 이러한 사항이 당시 신라인이 남겨 놓은 문자자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신라에서 문자가 발생한 초기의 모습은 5세기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청동그릇나 청동방울에 새겨진 단어에 해당하는 문자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해져 신라 문자생활에 영향을 미친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격적인 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가 석문인데, 6세기 석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율령 반포 및 문자의 보급 등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반영구성을 가진 단단한 돌에 교시하는 내용을 써서 강한 시행 의지를 표명하려 한 것이다.
특히 영토 확장 과정에서 그 주민을 신라인으로 포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와 관련된 사항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석문이 널리 작성된 것이다. 지방으로 편입된 지역의 주민을 율령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최고(最古)의 비석인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등이 있다.
영역 확장과 관련해서는 진흥왕이 새로 편입된 지역인 창령,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 등이 남아 있다.
한편 신라 영역에 들어온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주민들을 성 쌓는 작업에 동원하는 등의 모습은 남산신성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전국에 댐을 쌓아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영천 청제를 쌓을 때 세운 청제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비문과 더불어 신라 삼국통일에 기여를 한 화랑도와 관련된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의 화랑의 맹세를 통하여 통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대표 유물]
국보 제3호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해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1141호 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의 점판암제(粘板巖製)로,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라 호칭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
한자, 한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금석문 유물로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젊은이들의 신서(信誓) 관념의 표상물(表象物)이고,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명문의 임신년(壬申年)은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이며 서예사적(書藝史的) 측면에서도 자형과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金石文)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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