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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문화

낙화암에서 진짜 3천 궁녀가 죽었을까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 바로 31대 의자왕입니다.  그리고 의자왕 때 국력이 하도 약해져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가 멸망하고 말았으며....

 

 또 백제가 멸망한 것에 대해서도 의자왕의 실정을 손꼽는 학자들이 많으며, 특히 의자왕이 3천명의 궁녀를 두어 주색에 빠졌다는 역사기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물론 3천명의 여성들이 백제가 멸망한 울분 때문에 금강에 투신했으며...

 

 헌데 의자왕의 3천궁녀설에 대해서도 역사학계에서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주장들이 분분합니다.

 

  먼저 3천궁녀설을 지지하는 측은 의자왕이 한 나라의 임금이고 또한 최고지도자였으므로 그만큼 궁성을 넓혀서 많은 비빈과 궁녀를 뽑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3천 궁녀설에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측에서는 의자왕이 제아무리 한나라의 왕이라 하지만 당시 궁성의 규모로 보았을 때 3천여명의 후비와 궁녀를 뽑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견을 보이고 있거든요.

 

 또 제가 생각하기에도 '의자왕의 3천궁녀설'이라면 당시 의지왕이 궁성에 거느리고 사는 여자들은 정실왕후를 위시하여후비와 궁녀들을 모두 포함해도 그저 3백명에서 5백명밖에 안되고 .  수도인 사비성에 거주하고 있는 귀족 부녀자와 평민 여자까지 모두 합해야 3천 궁녀설에 부합할 것으로 사료되며...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만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구 4만5000명에 군대는 2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과연 가능했을까요?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부여의 인구가 9만5000명인데 현재의 도시 능력으로도 궁녀 3000명을 거느리기는 어려울 것이구요. 또 부여 어디에 3000명을 수용할 주거 공간이 있는가요.

 

 그렇다면 ‘3000 궁녀’라는 말은 누가 먼저 했을까요. 어떠한 1차 사료로도 궁녀가 3000 명이었고 그들이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습니다.

 

 안정복(安鼎福)의 기록(‘동사강목’ 권2 경신년 추 7월 조)에 따르면 ‘여러 비빈들(諸姬)’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랍니다.

 

 과문한 탓이라고 생각되지만, 3000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일제시대에 나온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金庾信·야담사 · 1941)이었다고 합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李弘稙)의 ‘국사대사전’(지문각 · 1962)일 것이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3000 궁녀의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라고 하네요.

 

 아무튼 이런 얘기와 함께 의자왕의 평소 공적이나 행실을 비교해 보노라면 나는 의자왕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낍니다. 그는 무왕(武王)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海東曾子)의 칭호를 들었구요.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지 않습니까.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지요.

 

 결국 재위 20년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 해에 죽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芒山)에 매장됐구요.

 

 요컨대 의자왕과 낙화암에 관한 역사는 허구이다. 그에 관한 어떤 일차 사료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일제시대 식민지 사학자들이 백제를 비하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음)했고, 궁녀 3000명을 데리고 살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곡필했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자료로 그를 인신 공격했지는 않았을까요. 그런 점에서 의자왕도 이 나라 역사의 한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고 있을 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