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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이 내린 군사 지휘권에 관한 명령서, 즉 ‘유서(諭書)’는 세로 56.9㎝, 가로 80.3㎝의 크기로 1798년(정조 22) 음력 12월 1일 정조가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에게 밀부(密符)와 함께 내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 지방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留守) 등이 왕명이 없이 스스로 군사를 움직이거나 간계에 의해 군대가 동원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밀부(密符)의 제도가 있었다.
밀부는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있는데, 가운데를 반으로 갈라서 오른쪽은 부임하는 관원에게 주고 왼쪽은 대궐에서 보관하였다. 비상사태가 일어나서 군대를 동원해야 할 때 명령서인 교서(敎書)와 함께 왼쪽 밀부가 내려오면 해당 관원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른쪽 밀부와 맞추어 본 후 틀림이 없을 때 비로소 왕명임을 의심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군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발병부는 그 형체가 둥글며 한쪽 면에는 발병(發兵)이라 쓰고 다른 한쪽 면에는 모도관찰사(某道觀察使)·절도사(節度使)라고 쓰며 여러 진(鎭)은 진의 이름[鎭號]을 쓰게 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의 밀부의 형체는 원형인데 한쪽 면에는 몇 번째 부[第幾符]인지를 쓰고 다른 한쪽 면에는 어압(御押)하여 가운데를 가른 후 오른 쪽 편은 해당 관찰사·통제사(統制使)·수어사(守禦使)·유수·절도사·방어사(防禦使) 등에게 주고 왼쪽 편은 대궐에 보관하였다. 무릇 발병發兵·응기應機 등의 일에 있어 밀부를 합하여 간모奸謀를 방지하는 것은 모두 부임할 때 오른쪽 밀부와 함께 받은 유서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고 있었다.유서는 유서식(諭書式)에 해당 관원의 직함과 성명 그리고 연·월·일만 기입하면 된다. 그러나, 유서식에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1596년(선조 29) 2월 16일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임명된 유성룡(柳成龍)에게 내린 유서는 한 방면의 책임을 부여한 것이 아니므로 유서식과는 약간 다르다. 생략된 부분과 변형된 부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2월 27일에 황해도 병마절도사 이성묵(李性默)에게 내린 유서와 1870년(고종 7) 3월 18일에 행수원유수(行水原留守) 이재원(李載元)에게 내린 유서 등은 모두 유서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유서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를 찍었다. 유서는 그 관원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으로서 유서통(諭書筒)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유서와 밀부는 조선시대 군사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다른 고문서에 비해 현존하는 수량이 적은 편이다.
이의준(李義駿):1738(영조 14)∼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명(仲命). 택(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량(顯良)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휘중(徽中)이며, 어머니는 서종옥(徐宗玉)의 딸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 병과 급제자에 상준(商駿)으로 되어 있어 상준은 초명, 의준은 개명으로 생각된다. 부교리·종성부사·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798년(정조 22) 황해도관찰사 재직 중 병사하였다.
R 참고문헌
- 『경국대전』권4, 병전, 부신조(符信條)
- 『대전회통』권4, 병전, 부신조(符信條)
- 『한국고문서연구』(최승희, 1989,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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