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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독서제도‘사가독서 및 독서당’을 찾아서




신분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 조선시대의 독서제도

조선시대의 독서제도는 한 특권층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그 명칭도 다양하였다. 즉, 왕에게는 경연, 세자는 서연, 문신에게는 사가독서, 잡직 종사자는 습독관제도를 두고 독서를 통하여 인격과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연이란 왕이 경연관을 두고 강독하는 것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독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아침에 강독하는 것을 조강, 낮에 실시하는 것을 주강, 저녁에는 석강, 그 밖에 밤에 문신들을 불러 독서 토론하는 것을 야대라 하였다. 서연은 세자가 서연관들과 강독하는 것으로 과목은 왕과 마찬가지로 유가서와 역사서 등을 주로 읽었다. 사가독서는 문신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왕이 그들에게 일정기간동안 휴가를 주어 글을 읽도록 한 제도로서 대상자는 문관 중에서 그 혜택을 받았다. 습독관제도는 잡직에 종사한 자들 중에서 발탁하여 그들의 전문성을 양성하는 제도이다. 즉, 무관에게 주어진 무경습독관, 의사에게 주어진 의서습독관, 승문원의 이문습독관, 사역원에서는 한학습독관, 관상감은 천문학습독관, 장악원의 예악습독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다양한 독서제도가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사가독서 및 독서당에 한해서만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의 사가독서賜暇讀書와 독서 장소  

조선시대의 독서제도 중 사가독서의 시발점은 세종 때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종은 학술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세종 2년, 1420)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선비들 중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업무를 보도록 하였으며, 세종 8년(1426) 12월부터는 이들에게 별도로 휴가를 주어 집에서나 사찰 등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로 발탁된 자는 권채權採, 신석조辛石祖, 남수문南秀文 등 3명으로(세종실록 권34 세종8년 12월 무오) 세종은 이들에게 일정기간 휴가를 주고 집에서 글을 읽는 ‘재가독서在家讀書’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가독서’는 친구들의 빈번한 왕래 때문에 독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사찰에서 독서하는 ‘산사독서’를 하게 하였다. 산사독서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기록되어 있는 조위(曺偉; 1454-1503)의 독서당기에는 세종 24년(1442)으로 되어 있다. 산사독서인들로는 <대동야승>에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이석형 등이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를 하였고, <용재총화>에서는 홍응, 서거정, 이명헌 등이 장의사에서 독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최항崔恒, 박원형朴元亨, 유성원柳誠源, 강희맹姜希孟, 노사신盧思愼 등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들이 독서한 서적은 주로 경經, 사史, 백가百家,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등이었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시도된 사가독서제가 인재양성의 토대가 되었고, 문종 때에도 이 제도는 계속되었다. 문종 1년(1451)에 홍응洪應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어 장의사에서 독서하도록 하였으며, 성종조에 와서도 계속되었으나 사찰에서 행한 독서는 성종 초기에 금지되고 빈집에서 하는 공가독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성종 7년(1476)부터 다시 산사독서로 바뀌었으나 한 동안 내적인 사건과 계속되는 가뭄 및 기근 등으로 사가독서는 정지되기도 하였다.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 및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의 대우

성종 중반에 정지된 사가독서는 성종 22년(1491)에 다시 부활되면서 독서의 장소를 사찰로 정하려고 했으나 성종의 유학숭배사상에 맞지 않다하여 별도의 건물을 지으려고 계획하였다. 계획했던 장소는 남호(南湖 ; 현재 용산) 귀후서 언덕에 위치한 폐사찰이라고 용재총화 권9, 조위의 독서당기, 광해군일기 등에 기재되어 있다. 당시의 독서당은 20간으로 증축하여 편액과 조의曺偉(1454-1503)가 쓴 독서당기讀書堂記를 걸고 성종 24년(1493)에 낙성식을 하였다. 낙성식 후에도 독서당 수리는 계속되었으나 성종 25년(1494) 5월부터 가뭄과 굶주림 때문에 독서당의 수리는 완벽하게 완성되지 못하였다. 사가독서자의 대우문제는 국가에서 모든 식량을 공급하였으며, 수시로 독서권장을 목적으로 사가독서자에게 임금이 직접 술과 안주를 내리기도 하였다. 성종 24년 7월 6일에도 술과 안주를 하사하였으며, 8월 18일에도 독서당에 술과 수정배水精杯를 하사하자 홍문관의 관원이 도금으로 수정배의 받침대를 만들고 김일손이 수정배에 글을 지어 새기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淸不, 虛能受, 德其物, 思勿負.”(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알고, 생각을 저버리지 말라; 增補文獻備考 卷221. 職官考8 讀書堂. 燃藜室記述 別集 第7卷 官職典故 讀書堂所收 大東韻玉.)

그리고 뒤에 서문을 지었는데 ‘잔이 처음에는 밑받침盤이 없었으므로 공장工匠을 시켜서 만들게 하고 구리바탕에 도금을 하였다.’ 반면 네 둘레에는 임희재任熙載의 팔분체八分體 글씨로 명銘을 새기고, 밑받침 한가운데는 강사호姜士浩의 전자체篆字體로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 5자를 오목하게 새겼다. 뒤에 지키던 자가 훔쳐가 버렸는데 가정년간(嘉靖年間; 1522-1566)에 조사수趙士秀가 중국에 가서 구해온 것으로 보충하였다고 한다.

<본 수정배는 연산군(11년 11월, 1505)이 홍문관을 혁파하면서 승정원으로 옮겨졌는데 중종 때 사가독서의 부활과 함께 다시 독서당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영조가 독서당에 소장된 수정배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친필로 ‘이제야 옛날 물건을 보니 팔순에 좋은 구경을 하였다. 특별히 술잔 셋과 함께 보관하라.’고 써서 내리고, 전 대제학에게 발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있다.( 英祖實錄 卷120 英祖 49年 4月 22日 庚戌).>

아무튼 이 수정배는 독서 장려를 목적으로 내린 성종의 깊은 뜻이 담긴 물건이라는 구실로 독서하는 사람들은 소중히 여겼다.

이와 같이 성종은 사가독서자에게 식량과 술 및 물품 등을 내려주며 독서를 권장하기도 하고, 과제를 주어 수시로 그 결과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는 강혼, 권건, 권경유, 권오복, 김감, 김상건, 김일손, 박증영, 신용개, 신종호, 양희지, 유호인, 이경동, 이승건, 이의무, 이종준, 조위, 조지서, 채수, 최부, 허집, 허침 등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1명, 20대가 12명 30대가 7명, 기타 연령 2명으로 20대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도록 영광의 길을 걷지 못했다. 연산군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사건(무오사화 ; 1498년, 연산군 4년)으로 대부분 투옥되거나 사형되었다. 당시 투옥된 인물은 강혼, 신용개, 이의무, 조위, 최부 등이었으며, 사형된 인물은 권경유, 권오복, 김일손, 이종준 등이었다.

그밖에 이경동은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고, 이승건은 관직을 추탈당했으며, 조지서와 최부는 참수당하는 등 불운의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들은 비록 연산조에 이르러 비운의 길을 걸었으나 성종의 치적에 많은 공을 세우고 꾸준히 성리학을 발전시켜온 인물들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성종조에 발전된 사가독서제는 연산조 초까지 실시되었으나 연산군(1476-1506)의 실정으로 폐지되었다가 중종조에 다시 부활되었다.


중종의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 건립

중종(1488-1544)은 19세(1506)에 등극하여 연산군의 폐정으로 문란해진 정국을 바로 세우는데 역점을 두고 성종이 추구하였던 성리학을 이룩하고자 사림을 다시 등용하는 등 유교정치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제일 먼저 연산군이 혁파한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시작하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실시하였다. 사가독서의 자격은 홍문관의 관원 중에 젊고 총명한 자에게 주어졌다. 사가독서의 숫자는 1회에 4명에서 12명이었으며, 독서기간은 보통 6개월 이상이었으나 중종 12년 7월에 홍문관 정자 안처순安處順이 6개월씩 교대하는 것은 본사의 업무를 보지 않는 폐단이 있다는 건의에 따라 3개월로 바뀌게 되었다(朝鮮王朝實錄. 中宗 12年 7月 丁亥. 卷28. p.289下右). 당시 독서당에는 12명의 직원이 2조로 나누어 숙직하였으며, 한 달에 쌀 15섬, 콩 15섬과 내섬시內贍寺에서는 날마다 술 1병과 소금, 간장, 채소, 땔감 등을 제공하고, 장악원에서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중종은 술과 선도배仙桃杯를 주면서 독서를 권장하였다

독서의 장소로는 중종 1년(1506)12월에 용산의 폐사에서 정업원(현 숭인동 청용사부근)으로 옮겼으나 정업원이 한양 내에 있기 때문에 사가독서자들이 자주 집에 왕래하고 친우들이 방문하여 독서에 전념할 수 없다는 연유로 별도의 독서당설립 계획이 수립되었다. 중종은 1511년 1월 19일 두모포 월송암 부근에 독서당 신축을 승낙하고, 또한 그 해 4월 2일 용산 독서당을 개조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모두 국내외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종 9년(1514)까지 정업원을 계속해서 독서당으로 사용하다가 중종 10년(1515)에야 비로소 동호東湖의 월송암 서쪽 기슭에 독서당을 착공하기 시작하여 중종 12년(1517)에 완공하고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동호는 두모포를 일컫는데, 1750년대의 서울지도인 도성도都城圖와 경도오부도京都五部圖, 1800년대의 수선전도首善全圖를 보면 아래에는 한강물이 흐르고 두모포豆毛浦 위쪽으로 응봉鷹峰과 부아현負兒峴사이에 독서당讀書堂이라 표기되어 있다.

현재 성동구 옥수 2동 부근을 말한다. 그 규모를 보면, 김안로金安老 ;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한강 북쪽 기슭에 자리한 동호당은 규모가 남호당보다 넓고 꾸밈도 더 화려하며, 또한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량 및 공급물도 더 많고 훌륭하다. 그래서 모두가 독서에 열중하였으므로 독서당은 항상 빈집처럼 조용하였다.”고 했다.


중종이후의 사가독서     

중종이 죽자 첫째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소생인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왕비 동생인 윤임이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 소생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어린나이에 왕의 자리에 앉은 명종은 8년 동안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하에 있으면서, 대윤과 소윤의 소용돌이 속에 어지러운 정국을 보냈다. 더욱이 문정왕후의 불교신봉으로 문신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을묘왜변과 임꺽정의 난 등 참으로 혼란스런 정국이었다. 그러나 명종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학문에 뛰어난 문신들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다. 물론 사가독서자들의 나태로 문제점도 많았지만 문제점이 많은 만큼 명종 또한 그들에게 과제를 내리고 그 과제를 평가하여 우수한 자에게 상을 내리기도하였으며, 술과 호박배琥珀杯 및 음식을 내려 사가독서자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독서의 장소도 중종조에 건축한 동호당을 이용하면서 명종 7년에 동편에 건물 한 채를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심수경沈守慶 ; 1516-1599의 <유한잡록遺閑雜錄>에 “동호당은 처음에 대청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쪽으로 침실이 있었는데, 명종 7년(1552)에 임당 정유길(1515-1588), 낙촌 박충원(1507-1581), 국간 윤현, 동원 김귀영(1519-1593), 청천당 심수경(1516-1599) 등의 건의로 누각 동쪽에 집 한 채를 짓고 ‘문회당文會堂’이라 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명종시대의 사가독서는 불교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면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 때 실시되었던 사가독서는 선조에 이어져 임진란 전까지 계속되었다.



선조 역시 집권 초기에는 독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독서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4-6년까지는 별다른 활동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선조 7년(1574)에 독서당의 인원을 증원하도록 하라는 기록만 있을 뿐(宣祖實錄 卷8 宣祖 7年 6月 丙寅) 선조 13년(1580)까지는 별다른 사항이 보이질 않는다. 선조 14년에는 독서당 관원에게 과제를 내어 성적이 좋은 관원에게 상을 내렸는데 당시 김첨金瞻이 수석을 차지하여 아다개阿多介를 하사받은 일이 있다.

선조 20년(1587) 8월 25일에는 누각 북쪽에 있는 연못 위에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의 잔치에서 심수경과 이발 등을 초청하여 시를 읊기도 하였다. 이처럼 꾸준히 실시되어 온 사가독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동호독서당의 소실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즉위년인 무신년(1608)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독서의 장소가 동호당이 아니라 ‘한강별영漢江別營’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독서제도 중 사가독서는 세종 때 재가독서, 산사독서 등으로 시작하여 성종 때는 용산 남호독서당을 짓고, 연산군 때부터 중종 12년 동호독서당 완공 전까지 정업원에서 독서를 했으며, 중종 12년부터는 두뭇개 동호당을 건립하여 독서를 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광해군 때는 한강별영에서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인조·효종·숙종 조까지 명목을 이어갔지만 영·정조에 이르러 350여년의 역사를 지닌 사가독서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가독서는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독서하도록 하여 그 들의 가치관이나 인격형성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였음을 볼 때 오늘날 우리의 독서현실은 어떠한 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글·사진 | 김중권 광주대학교 교수, 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