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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문화

서울과 전주의 4대문

 

 

사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네  마리의 신성한 영물들로, 모두 상상의 동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도 이 사신을 등장시켜 수호를 바라는 염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나타난다.

 사신사상은 도교에서 유래됐다. 이 네 가지 신들은 손에 아무런 연장을 잡지 않고서도 자신의 몸에 지닌 조화력으로 수호의 임무를 다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데 4신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단지 선인들을 도와 다른 신들을 지키는 호위신의 역할일 뿐이었는데, 고구려에 들어와서는 그 의미가 변하고 더해져 4방위를 뜻하는, 중요한 신이 됐다.

 이 가운데의 하나인 사신도는 사방의 별자리를 상징적인 동물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백호를, 남쪽에는 봉황과 비슷하게 생긴 주작을, 북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현무를 그렸다.

 사신은 고구려 무덤벽화의 주요 제재 가운데 하나이다.

 무덤 벽화에서 사신은 4세기부터 7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총 34기의 무덤에서 확인된다. 초기에는 무덤칸 천장에 해와 달, 별자리, 신령스러운 동물, 연꽃 등과 함께 하늘세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 표현되지만, 점차 그 비중이 높아져 6세기 이후에는 무덤칸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유일한 제재이자 주제로 표현됐다.

 이는 같은 시기 중국의 무덤벽화· 화상전 등에서 사신이 거의 예외없이 자신을 부리는 선인의 보조자나 천장고임의 방위신으로만 그려지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고구려 무덤벽화의 사신 그림을 통해 고구려가 외래 문화요소를 어떻게 수용하였고, 어떤 방식으로 소화, 재창조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주작은 봉황이 두마리가 만났을 경우에 되는 것이며, 수컷이 봉이고 암컷이 황이라고 하며, 현무는 어둠을 다스리는 신으로 사방신에서 유일한 여자란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5대 궁궐이 있다.

 

 

 조선 창건 초기 ‘시경’의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 경복궁이라 했으며, 창덕궁은 태종 때 처음 세워진 궁궐로서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창경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 터에 1484년 성종이 별궁으로 건립했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이 살던 집터에 궁궐을 지어 당초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영조때 다시 경희궁으로 개칭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고, 고종이 태황제로 물러날 때 고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됐다.

 경운궁은 1906년 현재 위치의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사용하면서 대한문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문의 이름은 음양오행을 기본으로 지어졌다. 궁궐 중앙의 문은 임금의 정치를 의미하는 ‘정(政)’자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동·서·남·북문은 각각 봄, 가을, 여름, 겨울을 의미하므로 ‘춘(春)’, 추(秋)’ 등의 글자가 사용됐다.

 또, 궁궐 남문(정문)의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화(化)’자가 들어간다. 이는 백성을 교화하여 감화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셈이다.

 한국 건축에 있어 문은 단순히 독립적인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는 문간의 성격을 가진다.

 

 

 특히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성문은 모두 풍수지리설의 음양오행론에 의해 기가 나가면 안 되는 곳이라던가 이런 것을 따져 문을 만들었다.

 우리의 성문이나 궁궐문, 각종 건축물에는 그 의미와 유래를 담고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로 적는다.

 예를 들어, 도성의 문인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현판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흥인문(동대문)은 흥인지문으로 글자 수를 늘리고 두 자씩 두 줄로 쓰여져 있다.

 이는 음양오행론에 기초를 둔 풍수지리설로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음양오행상 동쪽은 인(仁), 남쪽은 예(禮), 중앙은 신(信), 서쪽은 의(義), 북쪽은 지(智)에 해당한다.

 그래서 남대문의 이름에는 예(禮)가, 동대문의 이름에는 인(仁)이 들어있다. 바로 이처럼 궁궐의 문도 풍수지리설에 의한 음양오행론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숭례문(남대문)은 서울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오행상 화(火)요, 예(禮)를 상징한다는 의미다.

 흥인지문(동대문)은 오행상 목(木)이요, 인(仁)을 상징한다.

 흥인지문은 서울성곽 동쪽 문으로, 조선 1398년(태조 7년)에 완성하였다가 1453년(단종 원년)에 고쳐 지었고, 1869년(고종 6년)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돈의문(서대문)은 오행상 금(金)이요, 의(義)를 상징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완공된 돈의문은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숙정문(북대문)은 오행상 토(土)요, 지(智)를 상징한다.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도성의 북문으로 삼청터널 위에 자리하고 있다.

 숙정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 훗날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혜화문(동소문)은 도성 동북방의 성문으로,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이어지는 동북로의 관문 역할을 했다.

 소의문(서소문)은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 지금의 서소문동 대로에 위치한 문으로 창건 당시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하였으며,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 역할을 하였고, 서소문 밖에서 주로 사형이 집행됐다.

 광희문(남소문)은 역시 다른 도성의 문들과 마찬가지로 1396년(태조 5년)에 도성이 완성될 당시 동남문으로 건립됐다.

 창의문(북소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알려져 있다.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6년(태조 5년)에 창건됐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를 자하동으로 부른데서 성문도 자하문으로 불려지게 됐다. 창의문은 서울도성 4소문 중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전주의 풍수좌향은 사신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기린, 남쪽으로는 봉황, 서쪽으로는 용, 북쪽으로는 거북을 두었다. 동쪽의 기린봉은 산세가 곧게 솟아났으며, 남쪽의 봉황암은 고지도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봉황암 앞에는 봉황지로 현재 효자동 근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주의 서쪽은 완산칠봉의 용이 서쪽으로 향하여 용트림하고 있으며, 용의 머리 부분이 현재의 용머리고개다.

 북쪽으로 읍성 내에 현무지(玄武池)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지리적으로 기린봉의 산세가 도솔봉으로 이어오다가 읍성쪽으로 내려와 금암동(현 KBS전주방송총국)에 거북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이름하여 4천왕봉이란 기린봉(동), 남고산(남), 황방산(서), 건지산(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방신 사상이 투영된 것이다. 사신도에 나타난 사방신 개념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 등의 사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전주의 경우 4방을 수호하는 네 개의 산이 있었으니 동쪽의 기린봉, 서쪽의 황방산, 남쪽으로는 남고산, 북쪽으로는 건지산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서쪽에 해당하는 산을 완산, 남쪽을 곤지산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4고사를 파악할 경우, 동고사는 중바위(승암산), 남고사(남고산), 서고사(황방산), 북고사(유연대) 등으로, 반드시 수호봉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 이는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했다고 한다.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으나 지난 1579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모두 파괴됐다.

 전주성 수축에 관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1734년(영조 10년)이다. 이 때 전주성이 너무 오래되어 퇴락했다는 이유로 조현명이 부성을 크게 개축하고 4대 문을 다시 쌓았다.

 그러나 전주성이 개축된 지 30여 년이 흐른 후 안타깝게도 1767년(영조 43년) 전주에 큰 불이 나, 민가 1천여 호와 함께 문루도 모두 불탔다.

 ‘풍남문’이란 이름은 관찰사 홍락인이 1768년(영조 44년)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이후 전주성은 전주-군산간 번영로가 뚫리면서 1911년에 풍남문을 제외하고 완전히 철거됐으며, 현재의 풍남문은 보수한 지 30여 년이 됐다.

 전주읍성과 풍수 체계가 파손 유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침략기 무렵으로 보인다는 해석이 많다. 경기전에 소학교를 세우고 오목대와 이목대를 절단냈으며, 용머리고개로 길을 내고 심지어는 동익헌을 없애고 길을 내었다.

 전주의 풍수지리 구도를 훼손시켜 조선왕조의 국혼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것으로 본다는 송화섭교수(전주대)의 설명이다

 서문은 ‘풍패’의 ‘패’자를 따서 패서문(沛西門)이라 했으며, 동문은 완동문(完東門),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고 했다.

 그 위치를 보면 서문은 현재의 다가동 파출소 근처, 동문은 동문사거리, 북문은 오거리쯤 된다. 성문이 있었던 자리에 현재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은 현재의 도청 자리에 있었으며, 전주부윤(현 전주시장)의 근무처는 옛 전주시청 현 중소기업은행 자리이다.

  전주읍성과 풍수 체계가 파손 유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침략기 무렵으로 보인다는 해석이 많다.

 경기전에 소학교를 세우고 오목대와 이목대를 절단냈으며, 용머리고개로 길을 내고 심지어는 동익헌을 없애고 길을 내었다. 조선왕조의 본향인 전주의 풍수지리 구도를 훼손시켜 조선왕조의 국혼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것으로  본다는 송화섭교수(전주대)의 설명이다.

 항공 사진으로 보면 용머리고개는 유연대와 어은골 뒷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몸체인 것이 신기할 만큼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야말로  힘차게 솟음질 치는 용의 머리 부분이다. 

 그 용머리고개가 지금 움푹 패이고 잘려 나가 말만 용이지, 그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원평, 삼천을 거쳐 용머리고개를 지나  전주성에 들어 왔다. 이때가 1894년 4월 27일(음력). 동학농민군에게 새벽은 승리의 여명과 함께 밝았다.

 전주에는 사방목신이 세워지기도 했다.

 동쪽으로는 현재의 우아동인 소리개재, 서쪽으로는 중화산동인 가마귀골, 남쪽으로는 서서학동인 난전 미륵댕이, 북쪽으로는 덕진동의 추천교 자리 가련내 등 4곳에 이정표지를 하기 위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표지목을 꽂아 길손의 애환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본래 장승으로 불리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푯말은 잡귀를 쫓는 액땜의 푯말로 먼길을 떠나는 길손이 도적을 만나지 않고, 우환이 없이 잘 다녀오도록 무사를 비는 낯익은 풍정이었다. 그렇게 오래돼 보이지 않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연유다.

 장승에 얽힌 토속신앙은 그보다 더 다양하고 재미있다. 장승의  코를 긁어서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임신중절의 효과가 있다고 하여 처녀 또는 과부들이 낙태 약으로 사용했으며, 부녀자들이 장승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더러는 그 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집안의 화목과 길 떠난 자식의 과거길을 빌기도 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병자의 사주와 이름을 적어 제사지내고, 혼기 놓친 노총각 노처녀들이 장승의 입에다 음식을 물려 놓고 소원성취를 빌기도 했다.

 물론 길을 찾는 나그네에게는 지친 다리를 쉬어가게 하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의 인근에는 수호신으로 장승을 세우거나 탑을 쌓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젖이 나지 않는 여인은 여장군장승에 자신의 젖가슴을 접촉 시키면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도 믿기도 했을까.

 전주엔 또 사면석불이 있었다.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네 곳에 석불이 주로 고려말에 조성됐다.

 전주의 사방불은 장승백이 근처  언덕백이에 위치한 미륵암(서서학동 석불입상,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에 1기, 중노송동 서낭당 근처 용화사에 1기, 그리고 진북동 진북사에 1기가 있단다.

 미륵암은 남쪽, 용화사는 동쪽, 진북사는 북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으나 서쪽의 불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아리송하다는 전문가의 설명. 하지만 미륵불이 전주의 사방을 호위하는 미륵불 국토세계를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 등 사(四) 고사는 전주의 재앙을 막고 안녕을 위해 지어졌다.

 동고사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왕조 시대 이전부터 창설된 절이라고 한다.

 그 처음 위치로는 승암산 배부분, 지금의 동고사 자리로 여겨진다. 도량 천년의 연륜을 산다는 귀목나무 머리를 짚어 유지(遺址)라고도 말한다.

 서고사는 서산(황산·황방산)의 중턱에 있는 사찰로 유명한 ‘효자천’이 있다.

 남고사는 남고산성 내에 위치한 절로 만경대, 천경대, 억경대 등에 둘러쌓여 있다.

 북고사(진북사)는 완산칠봉 중 용두봉의 자락이 북으로 흘러내리는 유연대 북서단 속칭 부엉바위절(호랑이 아가리터)라 부르는 곳(진북터널 옆)에 있다. 전라관찰사 이서구의 고사가 담긴 절로 경내엔 오백년 내내 숲정이 바람 속에서 다소곡이 지키는 미륵불의 품에 선 천년 묵은 고요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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