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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문화!

이경훈화백 작고 20주기전

남원출신의 서양화가 동창(東暢)  이경훈(李景薰, 1921-1987)화백의 두 번째 개인전이 19일까지 서울 신한갤러리서 열린다. 첫 번째 개인전이 1947년 익산에서 이루어졌었고, 작가가 작고한지 20년 만에 유작전 형식으로 가지게 되는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이 전시는 그래서 60년만에 개최되는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인 셈이다. 편집자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전주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고 이경훈화백의 유작전은 아들 완기(MBC 이완기 기술본부장)씨가 부친 타계 20주기를 맞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모은데 따른 값진 자리다.
 특히 작가는 중동학교 재학시절인 1939년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하면서 화단에 등단, 이후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수학 후 고국으로 돌아와 전주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미군이 실수로 불을 내 3백-4백점의 작품이 타버린 뒤 실의에 빠져 붓을 놓은 바 있었으나 30여 년 동안 미술교사로서 후학을 키우고 부천의 지역미술 발전에도 이바지 한 바 크다는 평가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유화 38점, 수채화 13점, 드로잉 작품 64점이 선보인다. ‘4·19 노도’, ‘신탁통치 반대’, ‘아낙’, ‘풍경’ 외에 병상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 ‘원두막 풍경’을 볼 수 있는게 더욱 의미가 크다.
 “이경훈선생은 불행의 그늘에 뒤덮인 미술인의 한 사람이다. 해방과 더불어 전북지역에 정착했을 때만해도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밝은 전망에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직후 신상회, 백우회에 가담하고서 1960년무렵 경기 부천으로 이주하여 목우회에 참여했으므로 가능의 세계를 엿보았던 게다.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부회장)”
  단지, 중앙화단에서 활동이 뜸했던 관계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작가로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한국 구상회화의 전형적인 모습과 함께 ‘자연주의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구상화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다.
 ‘다가공원에서 바라본 풍경(캔버스에 유채, 61×50cm(12호 F), 1960년)’, ‘제목 미상-유화018(캔버스에 유채, 103×57cm(40호 M), 1954년)’, ‘자화상(캔버스에 유채, 41.5×53cm(10호 P), 1964년)’, ‘제목 미상-수채화 010(종이에 수채, 34×25cm, 제작년도 미상)’, ‘제목미상-스케치 031(종이에 목탄, 20.3×33cm, 제작년도 미상)’, ‘제목 미상-스케치 034(종이에 연필, 19.6×26.8cm, 제작년도 미상)’, ‘전주천변(1992년 전북지역작고작가 유작전에 출품)’ 등.
 그러나 서대문 4·19도서관에 전시돼있던 ‘4.19의 노도(1965년, 60호)’는 도서관 증축 공사 과정에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1967년 민족기록화전에 출품했던 ‘신탁통치반대(500호)’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는 얘기는 있는데, 확인이 안되고 있는 까닭에 가슴이 아리다는 아들의 설명.
 기획자 이섭씨는 “유화작품 외 찾아보게 된 많은 수의 드로잉과 스케치에서 동창선생은 자신으로부터 달아난 예술혼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숨김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말년 작품 중에는 빛나는 드로잉 작품들이 보잘 것 없는 학습지나 시험지, 교무실 사용 서류 뒷면에 남겨져 있었다.
  유화 작품으로, 작가 사인이 있는 완성품이거나 미완성작품까지 포함하여 찾아내거나 빌리게 되어 전시에 내 놓게 된 것은 모두 41점이다.”고 말했다. 문의 (02) 722-8493. 017-353-5095. 이종근기자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이경훈화백

 

1.아들(MBC 이완기 기술본부장)이 회고하는 아버지 이경훈화백

 

 10년만 일찍 준비했더라면. 이경훈화백의 유작전을 준비한 MBC 이완기 기술본부장은 요즘 후회가 거듭 사무친다. 1987년 6월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간간이 당신 생애 마지막 작품 ‘원두막 풍경’을 손질하시며 ‘죽으면 유작전이라도 열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을 등진 지 2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아쉽다. 작품을 얼마 모으지 못했지만 도록에는 아버지의 일기, 제자들과 나눈 편지, 관련 기사 등 아버지의 흔적을 빠짐없이 담았다.
 
2.기획자 이섭씨가 말하는 이경훈화백

 

 삶이 가장 화려했던 청년 시절에, 예술혼이 온 몸을 지탱하게 했던 그 시절에 모든 추억들은 선생에게 죽음처럼 기억의 소자노 남아있었다. 작품의 양과 질을 모두 살피어 선생이 지향코자 했던 예술 세계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미덕이겠지만, 세월의 두께 때문에 모아지는 모든 것을 내보이고자 한다. 단지, 모아진 것 뿐이다. 아마도 지금 어디에선가 아쉽게도 선생의 작품이 개인의 집이나 창고에서 낯가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미술평론가 김연주씨의 동창 이경훈론

 

 이경훈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관전 아카데미즘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주류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그러한 화풍은 다양한 도전과 실험이 이루어졌던 시기에도 고수됐다. 따라서 작품 자체의 완성도로 볼 때는 뛰어나지만 시대적 흐름과 요구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근현대미술사에 대한 흐름을 분명하게 읽었고 그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지녔으나 작가로서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동시에 이 작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제고하게 만든다.

 

4.작가가 걸어온 길

 

 작가는 1921년 남원에서 출생,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다리 있는 풍경’을 출품하여 입선한 이래 1941년 4월 10일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 일본 유학생 출신 서양화 작가 단체 ‘백우회(白牛會, 1941-1965,  1955년 이후 白友會로 명칭 변경)’에 참여했다.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 후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 전주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것.
 이어 1947년 6월  유병희, 김용봉, 이병하, 한소희 권영술, 추교영, 허은, 김해 등과 모여 금융조합 도연합회에서 전람회를 갖고 이리(익산)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1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1948년  전라북도 미술전람회에 ‘소녀상’ 외 2점(제목 미상)을 출품했다.
 전라북도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1952-1953), 전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 전북지부 미술부장(1952)을 거쳐 1954년 6월 1일  동창선생이 주축이 되어 권영술, 김용봉, 김현철, 김용구, 문윤모, 소병호, 이복수, 이병하, 천칠봉, 한소희, 박두수 등이 회원이 된 서양화단체 신상미술회(新象美術會)를 창립, 1956년까지 활동,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5년엔 전북미술관 건립을 위한 한국원로 중견작가 초대전에 ‘인왕산 조망’을 출품했으며, 1983년 제2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위촉 및 초대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2년 전북지역작고작가 유작전에 ‘전주천변’을, 2005년 전북미술의 맥-근현대 작고작가 회고전에 ‘강화 풍경’ 등 4점이 선보이기도 했다. 고인의 기일인 14일 오후 5시 추모식이 열렸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