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개는 제2차 진주성전투 당시 순절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1593.6.21.~6.29) 당시 순절한 의암부인 주논개(義菴夫人 朱論介, 1574~1593)의 기록이 국립진주박물관에 공개되고 있다.
이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으로, 임진왜란 후 민간에 떠도는 설화와 야담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책에서 논개는 진주의 관기로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쳐 순국한 것으로 소개됐다.
논개가 처음으로 기생이라는 사실로 기록됐다. 그후부터 이같은 사실이 거의 기정사실화됐지만 실제로 그녀는 기생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많다.
논개와 함께 죽은 일본 장수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가토키요마사(加藤淸正)의 휘하로 임진왜란 때 조총부대를 이끌었다.
경상 진주에는 약 400년 전인 1593년 임진왜란 때 논개가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강으로 떨어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이름은 '의암(義巖)', 즉 의로운 바위라는 뜻이다.
바위의 본래 이름은 위암이었는데, 1629년 선비 정대륭이 논개의 충절을 기리며 바위벽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의암은 진주성 촉석루 아래 절벽에 있다.
그래서 의암을 보려면 촉석루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의암은 너비 3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데, 이 바위가 움직여 촉석루 절벽 가까이 들러붙을 정도가 되면 나라에 재앙이 생긴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논개의 생가로 알려진 곳은 수몰되어 근처에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이곳에는 생가 외에 동상과 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다.
논개는 장수현감으로 있던 최경회의 집에서 일하다가 최경회의 부인이 죽자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충의공 최경회(忠毅公 崔慶會, 1532~1593)는
전쟁터로 나가게 됐다.
최경회는 왜군과 싸우며 큰 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까지 했다. 그러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을 빼앗기자 남강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화순 소재 충의사의 '최경회 장군 난중 어록비'엔 최경회 장군의 어록과 절명시가 새겨져 있다.
호남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다
성이 있으면 내가 있고, 성이 망하면 나도 죽어야 한다
湖南我國之地, 嶺右我國之地(호남아국지지, 영우아국지지야)
城存我存, 城亡我亡(성존아존, 성존아망)
'최경회 장군의 절명시(絶命詩)'
촉석루 삼장사는
한 잔의 술로 웃으며 장강을 가리키노라,
장강물이 도도히 흐르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혼은 죽지 않으리라
촉성루중(矗石樓中) 삼장사(三壯士)
일배소지(一杯笑指) 장강수(長江水)
장강지수(長江之水) 류도도(流滔滔)
파불갈혜(波不渴兮) 혼불사(魂不死)
왜군들은 진주성을 빼앗고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를 벌였다.
논개는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아의 기생이 되어 잔치에 참석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왜장을 끌어안은 채 남강으로 떨어졌다. 논개는 혹시라도 왜장을 껴안은 팔이 풀어질까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끼었다고 한다. 진주교에는 논개의 정신을 기리는 쌍가락지 상징물이 설치되어 있다.
또, 영희정 하연부부영정(경남 문화유산자료, 領議政河演夫婦影貞)은 하연(1376∼1453) 선생과 그 부인 성산 이씨의 영정이 소개된다.
이는 무주 백산서원 소장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文孝公과 貞敬夫人 影幀)과 작품이 서로 다르다.
지금이야 부부 사진이나 초상화가 흔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부부를 나란히 그린 영정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연은 조선 세종 때 문신으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선생의 아들 하우명이 선생의 묘소 옆 영당에 영정을 모셔 놓고 아침 저녁으로 인사를 드렸다고 전한다. 그 후 선조 41년(1608)에 신천서원 안 사당으로 옮겼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지금의 장소에 사당을 옮겨 지으면서 영정도 함께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정은 나름대로 영정의 기본을 갖추고 있고 특히 다른 곳에서는 보기드문 부인의 모습이 나란히 모셔져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 기법이나 재료의 질감으로 보아 다시 그려진 것 같으며 그 조성시기는 130∼18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지금은 선생의 아들 하우명의 영정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 음악가로 활동했던 박연(1378∼1458)과 문신인 조반(1341∼1401)의 부부상이 전해지고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과 부인 성주이씨의 초상화다.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여인의 초상화가 희귀해진 사실과 비교할 때 이 부부상이 지니는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는 모사본으로, 그림에 보이는 부인의 의복과 모자는 조선 전기 여인의 의복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맨 윗부분이 뚫리고 좌우의 귀를 덮은 모자의 모양은 조선시대 여인들이 외출할 때에 머리에 쓰고 다니던 조반의 전신으로 보인다. 효성이 극진했던 조반의 셋째 아들 하우명이 훗날 어머니가 숨지자 3년 모친상을 치른 후 부모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그린 모사본이 진주하씨 문중의 백산서원(무주)에 보관되어오다가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국립진주박물관은 다음달 24일까지 기획전시실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 ‘천년 진주, 진주목 이야기’를 갖는다.
전시엔 진주성도(보물), 김시민선무공신교서(보물), 시왕도(보물) 등 137건 213점이 소개된다.
진주목은 고려 때부터 천년 여 동안 경상도 서부지역의 중심지였다. 그 영역은 오늘날의 진주시 외에 고성군·남해군·사천시·산청군·하동군의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지난 천년 여 동안 ‘진주목’이라는 고을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사람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한다. 또 뜻 깊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진주 사람들도 재조명한다.
전시는 크게 4개의 주제로 나뉜다.
제1부 ‘지리산과 남해의 큰 고을, 진주’에서는 지난 천년 여 동안 진주목의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다루었다. 995년 ‘진주’라는 고을 이름을 처음 쓴 이래, 진주목(고려∼조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조선후기), 경남도청 소재지로 불리던 시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특히, 진주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누정인 촉석루에 대해 조명한다.
제2부 ‘물산이 넉넉한 땅, 진주’에서는 진주의 경제적 풍요를 먼저 살핀 뒤, 진주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그 속에서 어떤 문화를 펼쳤는지에 대한 자료가 주로 전시된다. 이 가운데, 진주목에서 간행한 수학책이나 노비의 계모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눈길을 끈다.
제3부 ‘올바른 뜻을 품은 고장, 진주’에서는 진주 사람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였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남명 조식(1501∼1572)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의 사상을 계승하려 한 노력을 살펴본다. 이와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 국권회복운동, 형평운동에서 보인 진주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조명한다.
제4부 ‘도타운 믿음이 깃든 곳, 진주’에서는 진주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그들의 품었던 희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전통의 지리산 성모신앙, 불교신앙뿐만 아니라, 근·현대 진주지역에 새롭게 들어온 종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효종 학예연구사는 “이 전시가 그동안 잊혀지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진주목과 진주 사람들의 삶과 유산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이종근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number=854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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