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학교박물관이 전북 서예계의 큰 스승이자 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계원(桂苑) 민윤식(1919-2006) 선생을 기리는 특별전을 갖는다.
이 전시는 전북대박물관에 기증된 계원 선생의 서예 작품 130여 점 가운데 일부를 대학 구성원 및 지역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는 오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과 중앙홀에서 열린다.
효산(曉山)이광열(李光烈:1885-1966)은 일제시대에 교육자 겸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굳건히 지켰다. 그는 글씨와 그림(사군자)
분야에 뛰어나 후학도들을 교육하였고, 또 많은 작품을 남겨 전북서화사에 공헌한 바가 지대하다.
효산은 전주시 다가동 자택에서 서예학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한묵회(翰墨會)를 창설하여 많은 후진들을 지도했다. 한묵회에서 배출된 인물로 최상하, 민윤식, 명대혁, 김용식, 원금홍, 송진주 등 당시의 서화인을 길러내어 이 지역 서화 발전에 공헌했다. 다가공원의 천양정 입구에 서있는 ‘효산이광열선생기적비’는 효산 이광열에 대한 생평과 업적을 찬양한 비석이다. 글은 작촌작촌(鵲村) 조병희(趙炳喜,1910 ~ 2002)선생이 짓고, 글씨는 그의 제자인 계원(桂苑) 민윤식(1919-2006) 선생이 썼다.
그는 1919년 3월 28일(음) 정읍군 정우면 우산리 서산마을에서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작달만한 키에 후덕하기만 한 재사였다. 가난한 시골 한약방 의원이던 부친을 닮아 그 역시 남 퍼주는데 이골이 났다. 독학으로 익힌 한의술을 밑천으로 고인은 27살 나던 해 전주시 전동 1가 223에 ‘동양당한의원’을 연다. 8년 전 맞은 중풍과 싸우면서도 원근에서 찾아오는 환자를 돌봤다. 병원 앞에 좌판꾼들이 늘어서도 쫓기는커녕 아픈 기색이 있으면 맥을 짚어보고 약을 지어보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께부터는 전북 지역 연극인들 지원에 나섰다. 지역 연극협회에 수백만원 돈을 내면서도 “용처는 알아서 하라”며 털털 웃을 뿐이다. 연극인들의 동양당한의원 출입이 빈번했음은 물론이다. 현재의 ‘전북 연극상’은 ‘계원 연극상’이 원뿌리였던 것이다. 큰딸 귀임씨는 “아버지가 환갑잔치때 남사당패를 불러 꼽추춤을 추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풍류를 즐길 줄 알기 때문에 가난한 연극인들 사정을 이해하셨던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홀로 배운 글솜씨도 일품이었다. 팔순기념전 등 전시회도 수 차례 열었다고 한다. 추사체로 힘찬 필체로 쓴 글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 걸려있다. 전북지역 문화예술제인 풍남제때 사재를 내 ‘전국서화백일대상전’을 열어 서예대중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고인보다 1년 먼저 태어나 보름 앞서 간 민관식 전 국회의장과는 집안 동생뻘로 가깝게 지내며 장학회도 함께 하며 했다.
한의학과 한학 그리고 서예에 조예가 깊어 언뜻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정반대였다. 세째 병록(전 동국대 교수, 전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씨가 60년대 후반 딴따라들이나 가는 줄로 인식되던 연극영화과에 응시하겠다고 하자 “각자 앞날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라며 선뜻 승낙했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전주 사람들은 "그는 남을 욕하거나 나쁘게 말씀하시는 걸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늘 웃고 남에 대해 관대한 까닭에 장수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셨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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