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산구곡가, 용담팔경, 진안팔경

이산구곡가, 용담팔경, 진안팔경

이산구곡가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 1862~1938)의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정사에서 진안 마이산을 둘러싼 구곡팔경의 아름다운 승경을 읊은 창작 가사이다.
'이산구곡가'는 이도복이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이산 정사를 낙성한 후, 이산 정사에서 주자의 '무이구곡가', 고산의 '고산구곡가'를 전범으로 하여 진안 마이산을 둘러싼 구곡 팔경의 아름다운 승경을 음미하여 읊은 창작 가사이다. 
'이산구곡가'는 진안 마이산 구곡의 승경을 노래하는 가운데 민족정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창작된 가사로 이산 정사의 낙성과 더불어 널리 배포된 목적적인 가사이다. 따라서 '이산구곡가'는 민족정기를 환기시키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마이산 경승 자원에 대한 스토리텔링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그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수월리에서 태어나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3·1 운동의 좌절과 망국의 한을 달래고자 영호남을 전전하면서 500여 문하생들을 가르쳤던 우국충절의 조선조 말기 유학자이다.
 마이산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산이자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유사와 유적들을 부각시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산구곡가'를 지었다. ‘이산(駬山)’은 진안 마이산의 준말이다. 
'이산구곡가'는 “어화 우리 벗님네야 젊었을 제 귀경가세”의 발어사로 시작하여 “이 경치(景致)를 못 다보면 평생 유한(平生遺恨) 되리로다”의 결어사로 끝나고 있다. 각 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곡은 이산(駬山)의 천석(泉石) 구경, 1곡은 풍혈냉천(風穴冷泉), 2곡은 수선루(睡仙樓)와 구소(龜沼), 3곡은 광대봉(廣大峰)과 용연(龍淵), 4곡은 용암동천(龍岩洞天)과 와룡선생(臥龍先生), 5곡은 이산묘(駬山廟)와 마이정사, 6곡은 나옹 선사의 나옹암(懶翁菴), 7곡은 금당사(金塘寺), 8곡은 봉두굴(鳳頭窟), 9곡은 마이정(馬耳頂)의 승경에 대해서 읊고 있다. 
4곡에서 '삼국지'의 와룡선생 제갈량을 용사하여 진안 지방에서 창의한 의병장 이석용의 거병을 상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5곡과 9곡에서도 애국충절의 정신을 담고 있다. 충신열사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의 애국 사상,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다는 주필대의 유적, 조선 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몽금척(夢金尺) 관련 속금산(束金山, 마이산의 이칭)의 승경 등을 노래하면서 우회적으로 우국충절을 표현하고 있다. 




용담팔경

용담팔경(龍潭八景)은 용담현 관아에서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명명됐다.
전북 진안 지역의 옛 용담현 경내 아름다운 여덟 가지 경치를 이르는 사언절구로,지금의 동향면에 살던 선비 성은명(成殷命)이 지었다고 한다. 태고정에 용담 팔경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었다.

8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강추월(龍崗秋月) : 용강산에 걸린 가을 달

태고청풍(太古淸風) : 태고정에 부는 시원한 바람

응봉락조(鷹峰落照) : 응봉에 깃드는 저녁 노을

송림수학(松林垂鶴) : 송림에 드리운 학의 정취

소요낙안(逍遙落雁) : 소요대에 날아드는 기러기 떼

옥천모종(玉泉暮鐘) : 옥천암의 저녁 종소리

삼천서원(三川書院) : 삼천서원의 풍광

성남귀범(城南歸帆) : 성남 마을로 돌아오는 돛단배

진안팔경

진안팔경(鎭安八景)은 진안군 진안읍 내의 여덟 가지 경치를 이르는 사언절구(四言絶句)로  '진안지'[1959]에 실려 있다. 작자는 미상이다.


마이귀운(馬耳歸雲) : 마이산에 감도는 구름

강령목적(羌嶺牧笛) :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부귀낙조(富貴落照) : 부귀산의 저녁 노을

고림모종(古林暮鐘) : 고림사의 저녁 종소리

학천어정(鶴川漁艇) : 학천의 고기잡이 배

우제세우(牛蹄細雨) : 우제들에 가랑비 내리는 풍경

남루효각(南樓曉角) :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우화제월(羽化齊月) :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

예전 선비들이 누정 등에 모여 시회(詩會) 등 수작을 할 때 그 지방의 팔경 또는 구곡 등의 풍광을 읊고 여럿이 이에 첨삭을 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또 그 결과를 누군가 문집에 기재하거나 누정에 현판으로 새겨 걸면 그것이 그 고장의 대표 풍광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안팔경'도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이 다분하지만 여럿이 합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작자를 내세우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객관적인 서술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시적인 표현인 경우도 있다. ‘학천어정’ 같은 경우 학천은 유역 면적이 짧아 고깃배를 띄울 정도의 하천이 아니었다.
 '진안팔경'은 진안현 관아에서 바라보이는 곳으로 한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