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9> 도로명에서 전주 인물을 만나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78> 도로명에서 전주 인물을 만나다

전주도로는 도로폭에 따라 대로, 로, 길 등으로 나눠지며, 전주시에는 기린대로, 백제대로, 동부대로 등 3개의 대로가 있다.

기린대로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그 하나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임을 들어 기린이라는 성인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완산팔경의 으뜸인 기린토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기린대로는 한벽당 부근에서 시작하여 월드컵경기장까지 전주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로, 오목대와 향교를 지나 전주시청 주변, 금암광장에서 호남제일문까지 이르는 전주 제1의 중심도로이다.

백제대로는 전주의 서남쪽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로 평화동 꽃밭정이 사거리에서 전주역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백제라는 이름은 온조가 세우고 견훤이 부활시켰던 백제의 땅을 상징하며 전주가 도읍이었던 것을 기려서 백제대로라고 명명한 것이다.

동부대로는 전주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도로로 색장동삼거리에서 출발해 아중역과 전주역을 거쳐, 호성동, 송천동을 지나 전주 IC까지 이르는 대로이다.

원래는 색장동에서 전주역까지는 아중로로 불리웠고, 전주역에서 전주 IC까지는 호성로로 불리웠는데, 2009년 새주소 도로명을 정비하면서 동부대로로 통합했다.

 새로운 도로명에서 옛 인물을 만나요

 시는 전주의 인물을 발굴해 태조로, 견훤로, 정여립로, 정언신로, 권삼득로, 호성로(이주), 추천로와 추탄로(이경동), 운암로(이흥발), 서귀로(이기발),  팔과정로. 최명희길로 부여하면서 전주 시민의 자긍심을 살리고 있다.

견훤로

역사적 영웅에게는 비범한 영웅담이나 남다른 출생의 비밀, 혹은 특별하고 판타지적인 일화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나라를 세운 시조의 경우 건국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탄생신화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는 내용의 신화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알에서 태어난 주몽과 박혁거세의 신화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게도 잘 알려진 어린 시절의 일화가 있다.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것이다. 견휜이 범과 같은 용맹한 기운을 타고 났다고 해서 그런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견훤은 백제가 멸망하자 완산주에 입성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을 확장에 나갔다. 그 뒤 왕건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였다.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항해 후백제를 세웠지만, 그의 평생 라이벌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었다. 먼저 기선을 잡은 건 견훤이었지만 힘을 키운 왕건에게 서서히 밀리기 시작해 결국 왕건에게 항복하고 만다.

견훤은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 주려 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 양검, 용검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 됐다.

결국, 아들들에게 등을 돌리고 라이벌 왕건에게 몸을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만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반역한 신검이 남에게 협박 받아 분수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여 목숨을 살려주게 준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은 울화병으로 등창이 생겨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 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하여 정치 체제를 갖추었다.

전주시 완산구의 ‘견훤로’는 바로 이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의 이름에서 따 지어진 도로명으로, 기점은 교동 산 7-22번지, 종점은 우아동3가 588-1번지가 해당된다.

이와 함께 견훤왕궁로(길)도 있다.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에 동에서 서로 난 길 이름으로, 기점은 중노송동 774-12번지, 종점은 인후동 1가 1529-1번지에 해당된다.

견훤왕궁로는 병무청오거리에서 기자촌과 서낭당을 통과해 모래내시장 쪽 새로 난 도로를 지나, 전주생명과학고와 전주여고 그리고 전일여중, 동북초등학교를 거쳐 인후2동 주민센터가 나오고 연평도해물찜에 도착한다.

견훤왕궁로라 명명한 것은 견훤의 왕궁이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으로, 좁게는 물왕머리 지역이고, 넓게는 동초등학교가 있는 지역까지를 포함한다.

*견훤왕성(동고산성)

한편 전주엔 견훤산성으로 부르는 동고산성(전북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 25번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1981년 4월 1일)이 있다.

 전주시 교동 승암산에 있는 산성으로,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산꼭대기를 둘러 성벽을 쌓았다. 이곳은 후백제 견훤의 왕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승암산의 절벽에 의지해 서북쪽으로 수구(水口)를 뚫었으며, 남북으로는 날개 모양의 익성을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성 전체의 둘레는 1588.3m이고, 북쪽 익성의 길이는 112m, 남쪽 익성의 길이는 123m이다. 동서축의 길이는 314m, 남북축의 길이는 256m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4m이다. 현재 동·서·남문터와 배수구문, 건물터, 우물터 시설이 성 내부에 남아있으며, ‘중방(中方)’, ‘관(官)’자를 새긴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전주가 후백제의 수도였음은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 있다.

이 산성을 왕궁터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성 안에 남아있는 성황사의 중창 기록에 잘 표현되어 있다.

1980년 성 내부를 조사할 때 건물터에서 ‘전주성’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면서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견해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태조로

전주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는 태조 이성계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태생적 시원과 영웅 탄생의 시발을 상징하면서 조선왕조 500년 왕조의 비조로서 태조의 위용이 꽃을 피운 경기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로의 시작점과 종점은 어디일까. 기점은 풍남동 3가 19-5번지로 종점은 전동 200-1번지로, 전동성당 쪽이다.

태조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발리산 자락으로 ‘발리산(發李山)’이란, 이름 그대로 전주이씨가 비롯된 곳이란 뜻이다.

이 발리산에는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다.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세거지인 자만동의 뒷산을 일컬으며, 오목대는 태조가 고려 말엽인 우왕 때 남원 운봉에서 왜장을 무찌르고 돌아오다 잔치를 베풀었던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이곳엔 전동성당과 전동성당 사제관, 경기전(어진박물관, 조선왕조실록보존지와 비,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조경묘 등), 전주 풍남문 등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2012년 6월 29일 국보 제317호 승격된 조선 태조 어진이 어진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태조 어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에 1점 만이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어진 가운데 유일한 국보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했다.

1872년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은 모두 25점이나 그려졌다.

면복본(冕服本), 정건본(幀巾本), 익선관본(翼善冠本), 곤복본(袞服本), 황룡포본(黃龍袍本), 입자본(笠子本), 마좌본(馬坐本) 등이다. 물론 모두 영전(影殿)이나 진전봉안용(進展奉安用)이다. 이들 태조어진은 문소전(文昭殿), 선원전(璿源殿),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영숭전(永崇殿), 목청전(穆淸殿), 영희전(永禧殿), 남별전(南別殿) 등에 봉안됐다.

태조 어진 봉안에 참여한 화가를 보면 윤상익, 조세걸, 이재관, 조중묵, 조석진, 채용신 등이 있었다

태조로에서 호남제일성 풍남문을 지나 남부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며 걸어가다 보면 차이나거리, 웨딩거리, 걷고 싶은 거리, 영화의 거리, 중앙시장, 노송천 산책로까지 자연스레 발길이 이어진다.

정여립로

정여립로는 석구동에서 만성동으로 이어진 길로 장장 30리쯤 된다. 전주에 살았던 정여립이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던 김제시 금산면 제비산 자락으로 가던 길목에 자리 잡은 길이 정여립로다.

기점은 석구동 614-1번지, 종점은 만성동 3-4번지다. 석구동의 신평에서 시작된 이 길은 삼천을 건너 해성고를 지나고 쑥고갯길을 지나 좌측으로 국립전주박물관을 지난다. 좌측으로 삼산지와 안심제를 지나 전주교통방송으로 이어진다.

정여립은 조선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혁명가로 전주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언신로

정언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완산지’에 기록된 인물이므로 도로명에 사용했다.

기점은 인후동 1가 157-32번지(신일중 사거리), 종점은 우아동 2가 926-1번지로, 총 길이는 1,865미터다. 경유지는 부남회관-인후초교-부영 2차아파트옆-롯데아파트-아중공원이다.

정언신은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됐던 인물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됏다.

하지만 서인 정철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했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 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지만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이어 1599년에 복관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에 제향됐다.

권삼득로

권삼득로의 기점은 중노송동 495-33(전주교등학교), 종점은 덕진동 2가 30-17번지다.

이는 전주고등학교 앞에서 북쪽으로 향해 전주문화재단, 진북우체국, 구 KBS 전주방송총국, 전주금암초등학교, 전북대학교, 덕진연못, 전북도립국악원, 호반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권삼득기적비가 전북도립국악원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비문은 석전 황욱이 썼다.

국창 권삼득은 ‘비가비(非可非) 명창으로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양반가문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권정으로 사람 소리, 새 소리, 짐승 소리 등 3소리를 얻었다고 해서 삼득(三得)이며, 19세기 전반(순조) 8명창의 으뜸 명창이었다.

전주의 근요 산과 계곡 등을 떠돌며 소리를 익혀 득음했다. 그는 흥보가가 장기이고, 더늠(특출한 소리 대목)으로 후세에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을 전했으며, 이로써 ‘설렁제(덜렁제)’의 창시자가 됐으며, 양반 광대라는 이름의 ‘비가비’라는 명창을 얻게 됐다.

호성로(길)

호성로(길)는 기점이 우아동 3가 602-62번지, 종점은 호성로 628-21번지에 해당된다.

‘호성’이란 도로명은 호성군 이주의 호국정신과 그의 선비정신을 기리고자 사용한 도로명이다.

이주는 세조의 아들 덕원군 서의 증손이자 임천군 광의 아들로 1562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평안도 순안 법흥사에서 사명당 유정과 함께 병법을 수련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창의,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적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평양으로 갔다. 그가 평양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때 그는 칼을 빼 수십명의 왜적을 참살하였다. 행재소로 나아가 선조를 배향했다.

선조는 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뜻 밖에 종친이 와 왜적을 소탕하여 대훈(大勳)을 세웠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그는 이곳에서 순안으로 나아가 대군과 합세 선봉에 서서 성 안으로 들어가 왜적 수십명을 참살, 선조가 그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호성군(湖城君)을 봉하고 마복패(馬服牌)를 은사(恩賜)했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됐다.

 
추탄로와 추천로(길)

추탄로의 기점은 덕진동 2가 530-1번지, 종점은 덕진동2가 635-6번지다.

추탄 이경동은 조선 성종 때 병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귀향해 이곳에서 낚시를 드리고 지내던 곳에서 도로명이 유래한다.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합수 지점에 추단 이경동을 기리기 위한 추천대(문화재자료 제8호)를 그의 후손이 지었다.

그래서 이곳을 추탄, 추천, 가르내, 사탄, 가래여울 등이라고 한다.

팔복동에서 덕진동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놓인 다리도 용산다리, 전주대교 등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이러한 연유로 추천대교로 부르고 있다.

추천로(길)의 기점은 팔복동 3가 산 240-1번지, 종점은 팔복동 4가 969-8번지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그대로 명칭에 부여했다.

추탄 이경동이 부친 달성공의 중병을 지극 정성을 다해 낳게 하자, 그의 효행에 감탄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나무 다리를 만들고 추탄교로 이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그는 강물에 위급한 아버지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로 넘실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선판 ‘모세의 기적’처럼 물살이 양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냇물이 갈라진 윗 마을을 상가르내, 아랫 마을을 하가르내로 부르고 있다.

운암로

운암로의 기점은 팔복동 2가 645-2번지, 종점은 팔복동 2가 660-1번지로, 휴비스와 구 전주지방중소기업청이 자리하고 있다.

운암로는 팔복동 2가에 있는 마을로, 팔과정에서 학문을 연구해 장원 급제한 운암 이흥발(1600-1673)을 기리기 위해 명칭을 부여했다.

그는 162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집의에까지 올랐으나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1637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명나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며 학문을 닦았다.

인조, 효종, 현종조에 걸쳐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모두 거절햇으며, 죽은 뒤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이조참의에 추증됐으며, 저서로 ‘운암일고’가 있다

서귀로

서귀로의 기점은 팔복동 2가 381-2번지(태평공업사), 종점은 여의동 777번지로, 운전면허시험장과 구 전주지방환경청(새만금지방환경청) 등과 공장이 즐비하다.

팔복동 2가에서 여의동에 이르는 서귀로는 서귀 이기발의 이름에서 도로명이 부여됐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전주출신으로 형은 이흥발, 동생은 이생발이다.

그는 형 이흥발, 동생 이생발과 함께 석계 최명룡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닦았다. 1618년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하자, 국모가 없는 나라라고 한탄하며 은거했다.

그는 인조반정 이후 1624년 갑자(甲子) 증광시 생원 3등 3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같은 시험에서 형 이흥발과 동생 이생발까지 삼형제가 동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는 당시 청(淸)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명(明)과의 의리를 주장하였으며, 인조가 승하하자 3년간 3년간 술과 고기를 마시거나 먹지않고 상례를 치르는 등 평생 충절을 지켰다. 이에 우암 송시열은 그를 동방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로 비교하면서 칭찬하기도 했다.

전주 팔과정로(八科亭路)

전주시 팔복동 '팔과정로' 신설구간이 2019년 6월 30일 개통됐다.
시는 “팔복동 제1~제2산업단지, 기린대로, 만성지구, 전북혁신도시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팔과정로’ 신설구간에 대한 막바지 점검을 거쳐 개통됐다. 팔과정로 확장,신설공사는 2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지난 2016년부터 700m 구간의 좁은 도로를 넓히고 새롭게 700m의 도로를 신설해 산업단지의 접근성을 높였다.

신설구간의 경우, 기린대로부터 제2산업단지까지 700m구간을 연결해 그동안 ‘ㄷ’자 형태로 우회해야 했던 팔복동 산단 입주기업들의 불편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래 완주군 조촌면 지역이었던 팔복동은 1957년 전주시의 시세확장으로 동곡리, 동신리, 신복리, 여의리의 일부와 유제리를 편입하여 새로운 동을 만들면서 ‘전주8현’을 기리는 정자인 팔과정의 팔자와 신복리의 복자를 한자씩 따서 팔복동이라 이름지었다.

팔과정 편액은 고 김용진 국회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 팔복동공단에 왔을 때 박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이며, 팔과정중수기(김형관 찬), 팔과정기(홍두현 기)가 전하고 있다.

팔과정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광해, 인조, 효종, 현종 등 4대에 걸쳐 황방산 기슭 반룡서숙(현 팔복동 반룡리) 문하에서 홍남립 등 8명의 문과급제자가 배출, 후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고 이철수는 팔과정에서 배출된 인물을 ‘부성8현’이라 명명하고 있으며, 진사 송사심을 국포선생이라 불렀다.

팔과정로(기점 팔복동3가 402, 종점 팔복동4가 998-11)는 전주천에서 온고을로로 이어진 길로, 팔과정을 길 명칭으로 부여했다.
이는 동곡리와 반룡리 사이에 세워진 정자로 조선 인조 때 판교 홍남립, 사간 이흥발, 목사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이순선, 송상주 등 선비 8명이 함께 세웠다.

원래의 정자는 없어졌지만 팔복정수장이 들어온 이후 전주시에서 다시 세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흔적이 희미해지자 판교 홍남립의 후손의 건의에 의해 복원된 후, 여러 차례의 보수작업을 통해 보존되어 왔다.

현재 운암로(기점 팔복동2가 645-2, 종점 팔복동2가 660-1)는 팔복동 2가에 있는 마을로, 팔과정에서 학문을 연구, 장원급제한 운암 이흥발(1600~1673) 을 기리기 위해 명칭을 부여했다.

팔복동 2가에서 여의동에 이르는 서귀로(기점 팔복동 2가 381-2 여의동 771, 종점 여의동 777)는 서귀(西歸) 이기발의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했다. 팔과정은 명소화 사업을 통해 새롭게 단장, 황방산 주변의 소와당, 혜학루와 함께 전주가 교육의 도시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건축물이다.

도로 개통을 통해 팔과정의 기운을 받아 앞으로 팔복동, 나아가 전주시에서 출중한 인재들이 나와 지역을 더욱 빛내길 기대해본다.

최명희길

소설가 최명희는 여러 번 전주를 '꽃심의 땅'으로 불렀다.

꽃의 심(心),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운을 다해 '꼿꼿이' 버텨온 땅이 전주다. 동학혁명의 중심지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자유와 평등의 '꽃'이 한때 피었던 곳이다.

전주엔 작가 최명희(1947-1998)의 생가 터와 그의 문학 혼이 올곧게 녹아 있는 최명희문학관이 있으며, ‘최명희길’도 있다.

동학혁명기념관에서 경기전 뒷담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의 한 중간에 있는 생가터와 그곳에서 최명희문학관을 잇는 ‘ㄴ’자 형 골목이 ‘최명희길’이다. 생가 터 표지석을 모서리에 두고, 위로 난 길의 끝에 동학혁명기념관이 있고, 옆으로 난 길의 끝에 최명희문학관이 있는 셈이다.

‘그것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그 윗대로 이어지는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캐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서 전주천을 거닐어봅니다. ‘사람들은, 여름밤이면 이 냇기슭 천변으로 몰려나왔다. (중략) 용소의 위쪽에서는 남자들이 자멱질을 하였다. 여자들의 자리는 용소 아래쪽이었다. 달이 없는 밤에는, 수면 위에 미끄러지는 별빛이 등불이 되어 주었고, 달이 뜬 밤에는 물소리가 달빛을 감추어 주었다’(혼불 2권, 166쪽)

작가는 전주천이 옆을 스쳐 가는 한옥마을에서 나고, 전주천이 어깨 걸고 흐르는 완산동과 다가동에서 자란 까닭에 소설로 전주의 수맥을 이야기한 바 있다. 오늘도 전주천은 생명과 상생을 안고 너그러이 윤슬과 함께 쉼없이 흐르고 있다.

은행로에 자리한 최명희길은 그야말로 전주한옥마을의 묘미를 느끼기에 적합한 조금은 좁고 아기자기한 골목길이다. 최명희 문학관을 찾는 관광객 또는 인근 주민들이 찾는데도 편리하다.

한옥마을 속 작은 골목이기는 하지만, 최명희문학관과 교동아트센터, 고종 황제의 후손이며 ‘비둘기 집’ 을 부른 가수 이석의 집으로 알려진 승광재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숨어져 있는 길이기도 하다.

경기전 뒷담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의 한 중간에 있다는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옥마을을 벗어난 곳에도 정여립 등 인물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명명한 곳이 많다. (저작권 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