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19> 강암 송성용선생 고택과 전주시 강암서예관
-'다붓다붓'은 한국화가 김도영이 강암 송성용고택 그린 작품
한국화가 김도영이 28일까지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성북동 하코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다붓다붓(53.5x45cm_한지에분채_2024)'작품이 유독 눈길을 끈다.
작가는 전북대 대학원 재학시절 교수님을 따라 방문, 툇마루에 앉아 강암 선생과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을 작품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옥을 주제로 한 한국화와 한글을 주제로 한 문자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한옥을 주제로 한 한국화는 민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통 그림시점인 하늘에서 보는 시점과 땅에서 보는 시점을 동시에 사용한다.
부감법을 이용해 한옥의 기와지붕 형상이 두드러지게 하고 평원법은 한옥 안에 펼쳐진 삶과 생의 흔적을 보여준다.
또 한옥의 형상을 재현하거나 풍경의 한 장면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한옥의 주는 정서에서 비롯한 사유를 담았다.
한글을 주제로 한 문자작업은 24개 한옥한글 이미지를 나무에 레이저 투각하면서 시작된다.
노랫말, 시, 문구를 자모음 조합으로 배열해 평면, 반 입체, 설치 등으로 시각화한다.
오방색으로 채색한 한지 위에 투각한 한지 글자로 아리랑과 훈민정음을 콜라주하기도 하며, 한글 자모음을 모발제작해 다양한 조명을 이용한 공간 설치작업으로 이어간다.
이렇게 한글은 자모음이 모여 무한한 소리를 만들어내듯이 작가는 무한한 작업의 소재로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은 정중앙에 기와를 인 한옥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그 내부는 깔끔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졌습니다.
주변 풍경은 여유로와 보인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돈되어 보이면서도 세밀하게 정성껏 그려진 정돈된 채색화이다.
분위기가 따뜻하고 한옥에서 옛 추억이 느껴진다.
한옥을 소재로한 자음자 모음자 하나하나가 흥미로우면서 채색된 색감이 따뜻하다.
작품 속의 건축물들은 실제로 세종시 부강리에 있는 홍판서댁 가옥도 있고 독락정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구체적임 건물과는 조금은 다르게 작가 자신만의 집과 마당, 주변 자연 풍경을 표현한다. 강암 송성용선생 고택도 예외가 아니다.
기자도 1995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선생의 고택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다.
천년 고도 전주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언제나 묵향으로 넘쳐난다.
전주 교동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晴烟樓). 이는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寒碧晴煙, 승암산 기슭 한벽방과 전주천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에서 비롯, ‘한벽’과 ‘청연’을 댓구로 사용,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가 전주시장 재임 시절에 쓴 글씨다.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한벽당)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리라.
바로 그 옆엔 전주시 강암서예관과 전 전북도지사의 아버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선생이 살았던 ‘아석재(我石齋)’가 있다.
만약 강암선생에 대해 잘 모른다면 전주 IC를 빠져나와 만나게 되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을 떠올리면 된다.
그 현판을 쓴 이가 강암선생이다.
전주의 관문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호남제일문'이 야간에도 위용을 뽐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일주문으로 유명하며, '호남제일문'이란 이름은 전주가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해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이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이자 조선왕조의 시조인 전주 이(李)씨의 고장으로,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옹골찬 도시다. 왕복 5차선 대로를 가로지른 위풍당당 호남제일문은 그 유서 깊은 자부심의 첫인상이기도 하다. 육교의 기능도 겸하니 한번 올라가볼 만하다.
'호남제일문'은 낯선 사람들에게는 전주의 고풍을 그대로 전해주는 문패이자 고향을 찾
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반갑고 따듯한 고향의 상징적인 표정이다. 이
'호남제일문'의 현판, 단아하면서도 고졸함을 잃지 않고 웅장한 듯하면서도
자칫 권위롭기 쉬우나 오히려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경지로부터
우리는 강암선생을 만난다.
선생은 물질이 정신을 앞지르는 시대일수록 예술가의 존재는 더욱 필요하다고 했
다. 어쩌면 한 예술가의 치열한 작가정신은 인간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진정
한 구원에의 마지막 통로일수 있다. 너나없이 앞을 다투어 공명과 부귀와
실리를 쫓는 시대, 이 어지러운 세상에 우리곁에 선생의 정신이
면면이 어어져옴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생은 전북의 예술적 전통
을 오늘에까지 탄탄히 뿌리내리게 한 예술가다. 당대를 빛낸 서예가로서는
이 세대의 마지막 선비로서 그에 붙여지는 찬사는 각별하다.
선생은 ‘내장산내장사’, 여수의 ‘금오산향일암’, 경주의 ‘토함산석굴암’ 등 많은 현판을 썼다.
그만큼 그는 서예의 대가로 손꼽힌다.
김제에서 태어난 강암 선생은 평생을 유학과 한문, 서예에 정진해 한국 서단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사군자 중심의 문인화에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전통의 고법을 현대적 조형으로 재창조하면서 특유의 ‘강암체’를 창조해내기도 했다.
선생은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나 유재 송기면(宋基冕 1882-1956) 선생에게 유년시절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중국의 여러 법첩과 한국의 갖가지 서예자료는 물론 화보를 중심으로 그림을 익혀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체와 사군자, 소나무, 연, 파초 등을 주요 소재로 하는 문인화의 대가가 된 인물이다.
이처럼 다양한 자체의 서예와 여러 가지 소재의 문인화를 고루 최고 수준에 올린 서예가는 강암 외에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 서예계의 평이다.
'나' 해당하는 서예의 원리에 통달한 결과 '십 백(十 百)' 장르에 적용해 각 장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서예가가 바로 강암선생이다.
집의 당호 '아석재'는 ‘물과 돌이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은 주자의 시구절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거문고 켜고 책 읽은지 사 십년에
거의 산중 사람 되었네
하루는 띠풀집 지어져
나의 산수에 고요히 서 있네
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
[朱子全書,卷66, 武夷精舍 雜詠(무이정사 잡영)]
이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아석재(我石齋)'는 강암 송성용를 위해 친구들이 마련해준 집이다. 별반 특별해 보이지 않는 소박한 한옥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대가가 휘호한 것이고, 집 안 곳곳에는 평생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고 산 강암의 지조가 어려 있다.
1965년 김제에 살고 있던 강암을 전주로 오게 하기 위해 친구들이 나서서 강암의 서예 작품을 전시하게 했고, 그 서예 작품을 모두 구입, 그 대금으로 집을 구입했다.
당시 집값은 63만 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주시 교동에 있는 강암의 고택인 아석재는 남향집이다.
집 앞에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아석재' 앞으로는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남천교(南川橋)가 놓여 있다. 천진교 옆에 안락와가 있었다면, 남천교 옆에는 아석재가 있는 셈이다.
최근에 이 남천교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청연루(晴煙樓)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천년 고도(千年古都)다운 격조가 있고 고풍이 완연하다. '완산팔경(完山八景)'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寒碧晴煙)’이다. ‘한벽’과 ‘청연’을 대구(對句)로 사용해서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다.
강암 말년에는 고택 터 일부에 강암 서예관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붓글씨인 서예만을 위한 갤러리를 만든 곳은 오직 이곳뿐이라고 한다.
선생은 무엇보다 사재로 1995년도에 강암고택옆에 '강암서예관'을 세워 강암선생 작품과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 등 1,162점을 전주시에 기부, 국내 초유의 서예전문전시관을 개관했다.
'강암서예관' 현판은 개관할 당시에 중국 당나라 때의 명필 구양순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그는 처음 서예 공부를 시작할 때 입문한 서체가 바로 구양순의 해서체이기 때문이다.
'강암은 역사다'
강암서예관의 1층 입구에 들어서면 강하게 다가오는 글귀이다. 이 글귀는 1995년 동아일보사 주최의 강암 회고전의 대주제이기도 했다.
같은 예향이라고 해도 전남은 그림이요, 전북은 글씨인것이다. 물론 전남에도 진도 출신의 걸출한 서예가인 소전(小筌) 손재형 (孫在馨)이 있다. 소전은 왜정 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서예가로 1970년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예 선생이기도 했다. 일본의 후지스카 교수가 일본으로 가져간 추사의 ‘세한도’를 해방 무렵에 일본에까지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다시 찾아온 인물이 바로 소전 손재형이다.
그러나 소전은 전남에서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지는 않았고, 일찌감치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반면 강암은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주에 살았다.
강암의 그 고집스러움과 지조가 어려 있는 집이 바로 '아석재'이고, 이 '아석재'가 전북의 글씨(서예)를 대표하는 집이 된 것이다.
'아석재' 옆에는 '남취헌(攬翠軒)'이라는 또 하나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일중 김충현이 1974년 선생에게 써준 '남취헌(攬翠軒)은 전체 구성이 가지런하면서도 여백이 넉넉해 시원스럽다. 유려하면서도 힘찬 글씨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일중도 강암을 만나러 전주에 왔다가 이 집에 들러 붓을 들었던 것이다.
'남취헌'은 깎아낸 비늘 무늬 표면의 칼칼한 질감과 유려한 글씨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람취(攬翠)'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어렸을 때 아미산으로 출가해 공부하는 모습과. 황제가 되어 아미산에 있는 불교사찰들의 흥성(興盛)함을 암벽에 조각한 글씨다.
선생이 사용했던 또 하나의 재호이다. '헌(軒)'자를 썼으니 '헌호'라고 해도 된다. '푸르름을 들이는 마루'라는 뜻이다. 선생이 거처하던 집의 대문을 나서면 바로 전주천이 흐르고 그 앞으로는 남고산이 푸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선생은 '남취헌'이라는 헌호를 사용했다.
왼쪽에는 액자에 '강암청거(剛菴淸居)'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유당 정현복의 글씨다. 진주의 ‘촉석루’ 편액을 쓴 이가 바로 유당이다.
'십우도(十牛圖)'는 선종의 유명한 수행서 가운데 하나인 '종용록(從容錄)'엔 “청거호승선사 송목우도 12장, 태백산 보명선사 송목우도 10장, 불국 유백 선사 송목우도 8장(清居皓昇禪師。頌牧牛圖一十二章。太白山普明禪師。頌牧牛圖十章。佛國惟白禪師。頌牧牛圖八章')이라 하여, 청거선사가 활동했던 시기인 북송대 105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12목우도(牧牛圖), 10목우도(牧牛圖), 8목우도(牧牛圖)가 전해지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청거선사처럼 살았는도 모른다. 김준승(金俊承) 서예가도 호가 청거(淸居)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선생이 친히 써서 집에 걸고 교훈으로 삼고자 했던 현판이다.
이는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의미'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남긴 말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윤집기중(允執其中)’과 같은 말이다. 중국 고대 성군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최초로 한 어구이다. 그 뜻은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로 풀이된다.
그 의미는 왕위에 올라 정사에 임할 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그 중심을 잡아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 말을 했다.
인심(人心)보단 도심(道心)을 갖도록 하는 차원에서 그 중(中)을 잡아야 함을 피력했다. 조선시대 많은 왕이나 학자들은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수양론적 차원에서 이 말을 원용,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을 전개했다.
'논어'엔 요임금이 "아 너 순(舜)아! 하늘의 역수가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을 잡도록 하라"라고 했다.
'서경'의 '우서대우모(虞書大禹謨)'는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해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을 것"이다고 했다.
'논어집주'에 의하면 ‘윤(允)’은 ‘진실로(信])'라는 뜻이고 ‘중’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명칭이라 했다. 중국 고대 성군이 왕위를 물려주면서 말한 말이다. 전자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후자는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한 말이다. 후자는 성리학이 형성하면서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구분할 적에 많이 원용됐다.
선생은 평소 이 말을 좌우명처럼 여기며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아석재에서는 당대 명필의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김도영 작가는 "2년 전 방문하여 보니 강암서예관마저 너무 옛 시간을 그대로 머금고 있어 아쉬웠다"면서 "전시장 및 작품관리에 점검이 필요해 보였는데 지금, 어떠한지 궁금하다"고 했다.
전북 출신의 작가는 전북대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류미술공모전 특선을 포함해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전북미술대전 대상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서울, 대전, 세종, 전북 등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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