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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와 유익서, 청와대 기와; 정읍의 청기와가 왜 청와대 지붕에 올랐을까?

보천교와 유익서, 청와대 기와; 정읍의 청기와가 왜 청와대 지붕에 올랐을까?

정읍의 청기와가 왜 청와대 지붕에 올랐을까?;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섰다. 그로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의 공간이었다.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면 74년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이 땅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이 일대는 고려 문종 때인 1067년 개경 밖에 3경을 설치하며 역사에 발을 들여놓는다. 경주가 동경, 서울이 남경, 평양이 서경이다. 천도를 계획한 숙종은 1104년 남경을 완공한다. 지금의 경복궁 서북쪽 태원전과 신무문 일대로 추정한다. 남경은 왕들이 남행할 때 머무는 공간이었다. 후대 왕들도 남경천도를 꿈꿨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국운이 기울며 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안충기 중앙일보기자는 정책주간지 'K-공감' 705호(5.22-28)는 '청와대 개방 1년을 말하다'는 꼭지를 통해 청와대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고 있다.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새로운 왕조의 근거지로 남경은 비좁아 그 앞쪽 너른 땅에 경복궁을 세웠다. 왕궁 근처는 당연히 백성의 접근을 막았다. 세종에서 선조 때까지는 백악산 일대에서 돌도 캐지 못하게 했다. 조선을 세운 지 딱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경복궁은 몽땅 불에 타버리고 그 뒤 270여 년 동안 폐허가 됐다.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일대도 관리를 못해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정사를 봤다. 조선 왕조 519년 동안 경복궁이 제1궁 역할을 한 시기는 절반이 못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경무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선다. 이전 총독 관저인 왜성대는 남산에 있었다. 퇴계로2가 교차로에서 남산1호터널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 지금은 공원이 된 자리다. 총독 관저 건물은 청와대의 출발점이다. 일제는 눈엣가시로 여기던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교가 모태)를 강압으로 무너뜨렸다. 
 정읍에 있던 보천교 전각들은 해체돼 서울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전주 기차 역사 등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때 보천교 본당인 십일전의 청기와를 가져와 경무대에 새로 짓는 조선총독 관저 지붕에 올렸다.
청와대 본관 지붕은 그렇게 도자기처럼 구운 기와 15만 장이 올라가 있다고 했다.
고창군 대산면 호은정(湖隱亭)은 정계원(鄭桂源)의 은거 터로, 율촌리 180번지에 있었던 장자였다. 이는 용오정사(龍塢精舍, 전북 유형문화재 제91호)와 고수면 예지리 세한정(歳寒亭) 등을 지은 구한말 호남지역 대목장 유익서(庾益瑞)가 지었다.
용오정사는 용오 정관원의 우국정신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2년(1885)에 세운 사당으로, 홍의재·경의당·상운루 등의 건물이 있다. 사당에는 정관원과 기삼연의 영정(초상)을 모시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건물로 내부 구조가 화려하다. 1934년 사당 덕림사를 세워 정관원을 주벽으로 하고, 정관원의 아들 극재 정방규를 추배했다.
자그마한 연못을 앞에 둔 서원 겸 사우 ‘용오정사’는 담을 두르고 모아 지은 세 채의 건물을 한데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용오정사는 유익서의 솜씨다.

“본명은 진현(晋鉉)이고 초명은 창현(暢鉉)이며 익서(益瑞)는 자이고. 관향은 무송이니 희충(喜充)의 아들로 1882년(고종 19년) 성송면 낙양리에서 출생했다. 외종숙 남궁연에게서 목공의 기예를 배워 대목(大木)이 되어 1924년 42세 때 문수사(文殊寺) 해체 복원에 부편수를 맡고, 덕림사 용오정사 건축에 10개 기둥을 굽은 원목으로 조화있게 구축, 문화재 지정에 일조를 했다. 구한말에서 일제치하에 걸쳐 한식 주택이나 공청(公廳)․ 사찰 등의 고건축 등 큰 건축 일을 잘하는 도편수였다”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의 설명이다. 

월곡 차경석(1880~1936)은  증산교 계열의 보천교의 본부였던 ‘차천자궁’을 만들었다. 유익서는 정읍에 이를 심묘한 솜씨로
지었다던 그 목수다. 차천자궁이 소유권 분쟁으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그 솜씨를 아까워한 사람들은 집을 헐어버리는 대신 뜯어 옮겼다.
하나는 뜯겨서 서울 조계사의 법당이 됐고, 다른 하나는 정읍 내장사의 대웅전이 됐다고 한다.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보천교는 강제 해산됐다. 일제가 십일전(十一殿)을 을 강제로 철거하려고 했다. 이종욱은 이를 서울로 옮겨와 태고사(조계사)를 지을 때 실무자였다. 또, 지난 2012년 겨울 정읍 내장사의 화재로 잿더미가 돼버린 대웅전은 차천자궁의 건물을 뜯어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전주전통문화연수원 정읍고택(별채)은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의 하나로 전해진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정읍시 장명동으로 옮긴 것을 1988년 박성기님(박중조의 부친)이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했다.
자연공원법의 제정으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고택의 유지 보수가 용이하지 않아 점차 폐가로 쇠락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소유자 박중조님이 2010년 전주시에 기증함으로써 2011년 6월 이전 복원,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서 활용하고 있다.
ㅁ자 건물의 정읍고택은 보온 효과를 높이고 바람을 막으려는 북부지방의 한옥 양식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용오정사의 기둥은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차라리 파격에 가깝다. 서산 개심사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말이다. 저 둥근 곡선을 보아라. 예로부터 ‘무위이무불위(無爲以無不爲)’라 하였던가.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경지가 아닐까. ‘크게 공교로운 것은 서투른 것과 같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을 용오정사가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진주했다. 총독관저는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의 관저가 됐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이어받았다. 가난한 신생국이니 관저를 새로 지을 여력이 없었을 테다. 관저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경무대’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며 대통령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경무대는 북한군이 점령했다. 전쟁 뒤 대통령은 다시 경무대로 돌아왔다.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이승만정부를 손절하며 독재의 대명사가 된 경무대 이름을 바꾸고자 했다.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靑瓦臺)가 후보에 올랐다. 화령은 이성계 고향 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이다. 조선을 건국하며 명나라에 요청한 두 가지 국호 중 하나다. 윤보선은 쉬운 이름인 청와대를 택했다.
‘Blue House’가 청와대의 첫 영어 이름이다. 미국 백악관(White House)을 염두에 둔 작명이다. 지금은 소리를 따라 ‘Cheongwadae’로 쓴다. 경내에는 한자로 청와대라고 쓴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를 새긴 큼지막한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 이름을 황와대(黃瓦臺)로 바꾸자는 말이 나왔다. 중국 쯔진청(자금성)의 기와 색깔처럼 황금빛은 황제를 상징한다. 절대 권력자에게 ‘한 상 올리려는’ 속셈이었을 테다. 박 대통령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바꿔서 되겠느냐며 물리쳤다.
현재 청와대 영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확정됐다. 경내 건물들은 노태우 대통령 때 지금 모습을 갖췄다. 살림집은 1990년 새로 지은 관저로 이사하고 집무실은 1991년 본관을 완공해 옮겨갔다. 임무를 다한 옛 청와대 건물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때 사라졌다. 식민 잔재 청소와 역사 바로 세우기가 명분이었다. ‘치욕도 역사인데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 ‘대통령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쓰면 어떤가’ 같은 얘기는 묻혀버렸다. 1995년에는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해체했다.
청와대 옛 본관을 철거한 자리는 흙을 돋워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 안에 놓여 있는 절병통(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에 있던 항아리 모양의 석조 장식)만이 옛 흔적을 말해준다.
청와대는 이 땅의 역사를 압축한 공간이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를 거쳐 오늘까지 흘러온 얘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1948년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 대한민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7달러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2022년에는 3만 2000달러로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됐다. 한국 여권은 세계에서 가장 편리한 여권 중 2위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192개국이다. 74년 동안 12명의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쳐가는 동안 이뤄진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