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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와유(臥遊)'의 진정한 가치

'와유(臥遊)'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현대에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기사 작성:  이종근 기자 - 2019.07.22 17:42
예나 지금이나 산수화와 유람기에는 ‘와유(臥遊)’라는 제목을 쓴 것이 적지 않다. 처음 이를 접한 사람들은 ‘누워서 노닌다’는 뜻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이 말에는 그럴만한 함축적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라는 기행문을 쓴 바 있다. 1199년 전주목(全州牧)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로 온 그는 전주 등 전북 곳곳을 여행하며 접한 특이한 견문거리를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노년이 되면 젊어서 견문한 기록을 펼쳐보고 그 답답함을 풀겠노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산수유람의 기회와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고경명의 ‘유서석록’, 홍백창의 ‘동유기실’은 하나의 산을 유람한 기록이 단행본으로 편집돼 널리 읽혔고, 홍인우의 ‘관동일록’,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등은 여러 산의 유래와 명승에 관한 인문 지리서 성격까지 지니게 됐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로 매겨본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제일의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 이제 돈과 곡식과 갑옷과 무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해 깊이 알아 가는 것은 머리 허연 이 서생이 다룰 바는 아니리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은 그가 관직을 사임하고 남원의 수령으로 내려가 있던 1611년 봄 두류산을 유람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이는 지리산을 말하며, 두류산의 의미는 ‘백두대간[頭]이 흘러왔다[流]’라는 의미이다. 유몽인은 두류산 곳곳의 경물을 눈에 보듯 실감나게 묘사했으며,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그곳 매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동정하기도 하여 치자로서 백성의 고통을 느껴 보고자 하는 마음도 드러나 있다. 임훈은 1552년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을 남겼으며, 김창협의 ‘동유기’를 보면 '덕유산 멀리로, 진안의 중대산, 금구의 내장산, 부안의 변산, 전주의 어이산, 임피의 오성산, 함열의 함열산, 용담의 주줄산(운장산)이 그 서쪽을 둘렀고, 용담의 기산은 주줄산 안에 있다. 고산의 대둔산은 북쪽에 비껴있다'고 했다. 심광세 '유변산록(遊邊山錄)’이 변산 유산록으로는 최초의 기록라고 한다. 부안현감으로 부임(1607년)한 지 넉 달 만인 5월에 바쁜 일정 중 시간을 내어 변산을 유람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그렸다 두루마리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옛사람의 글을 통해 갈 수 없는 아름다운 땅뿐만 아니라 개발 등을 통해 이미 사라져버린 산과 물까지 함께 즐겨 보는 건 어떠한가? ‘와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현대에도 되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야흐로 휴가철, 전북으로 모두가 오시라.

/이종근(문화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