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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 권병열의 그림, 선비 정신의 운필과 용묵

청곡 권병열의 그림, 선비 정신의 운필과 용묵

최형순(전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오늘의 문인화 정신
청곡의 화면은 그야말로 동양적이다. 서양화처럼 화면 완결성에 크게 개의치 않은 모습이다. <천지의 장구한 기운(2010)>에는 소나무들만 늘어서 있다. 천지도 없으며, 산도 능선도 바위도 찾을 수 없다. 산의 능선대신 소나무들이 늘어서서 만들어낸 선 위로 떠오르는 해가 걸려있을 뿐이다. 소나무 기둥 아래 부분도 모두 사라진 채다. 안개 위에 떠있는 정경처럼 화면 전체를 채우려는 의지가 없다. 작가의 이에 대한 예술철학은 분명하다. <전북문학>에 연재한 화론에서 작가는 그림의 여백이 어떤 의미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백으로써 먹을 감당케 한다(計白當墨).” 그리고 “허로써 실을 얻는다(計虛當實).”는 것이다. 동양의 그림과 정신은 일찍이 이런 화면 경영을 강조해왔다. 옛 시에서 이르듯, “물고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았으나, 그 속엔 물결이 일고 있다(只畵魚不畵水 此畵中有水派).”는 그림. 청곡의 그림에는 그 예술철학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소나무로 그린 천지’는 화면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이 가득한 그런 그림이 아닌 것이다.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사색의 정신이 사유의 결과로 남아있는 화면, 동양의 문인화 정신은 그렇게 청곡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청곡 권병렬은 전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일본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였다. 전주를 중심으로 후학들을 가르쳤고, 지역 미술과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해 왔다. 그는 스스로 ‘선비정신으로 빚은 운필과 용묵’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 예술철학에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답습이 아닌가 하는 혐의의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사실 그런 시각에는 과거의 극복을, 과거를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있다. 오히려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정말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청곡의 문인화정신은 바로 그 점에 기초한다. 10년 대나무를 그려서 내가 변하고, 또 십년을 그려 그림과 내가 다 변하고, 또 십년을 그려 비로소 진정한 대나무 그림을 얻으려 했다는 석도(石濤)의 화론은 여전히 중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 위에서 창작과 새로운 예술세계는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현대적 수용
이런 청곡의 화풍을 좀 더 살펴보면, 우선 충분히 두터운 먹 선을 만나게 된다. 그건 그냥 선이 아니다. 때로 먹의 농담으로 때로는 먹 선과 갈필로 다르게 그어지며 제각각의 역할로 바위의 준(峻)이 되는 것들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적묵과 엷은 담묵이 어우러진 결과는 강한 먹의 효과를 드러낸다. 어렴풋이 먹의 번짐이 절로 만들어내는 자연의 이미지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면 유화 물감을 두텁게 하며 붓을 찍었다 떼기를 반복하면 모래알 같은 표면 질감이 나올 수 있다. 그 오돌토돌한 표면은 스스로가 빛을 받아 명암과 그림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하나하나 통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래로 덮인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청곡이 힘써 만들려는 화면에서 그런 효과에 기대려는 태도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수없는 수련으로 연마한 필선들의 운용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또한 먹의 농담과 운필에 모든 기운을 담으려는 동양의 정신인 것이다. 그렇다고 화면 전체가 차 있는 그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설청탈속(雪晴脫俗, 2010)>은 화면 모든 부분에 산과 들이 가득하다. 눈 속의 맑음이 탈속의 세계를 담고 있는 듯한 화면에서 어떤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 명백하지 않은 곳은 없다. 멀리 엷은 먹이 드리워진 잿빛 하늘이 가득하고 그 아래 멀리 있는 눈 덮인 산과 능선에 먹 선으로 찍힌 나무들, 그 앞 가까운 곳에 눈의 명암이 만들어낸 산의 굴곡, 계곡 속에 외로이 위치한 눈 덮인 산가의 지붕과 우거진 나무들. 그렇게 모두 풍경 하나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은 서양화처럼 꽉 찬 화면이어서 지금까지의 작가에게서 이질적이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따져보면 이 작품 역시 화면에 먹이 번져 있는 면적은 겨우 반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저 흰 눈이 쌓인 곳으로 여백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동양적 화풍의 성격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다. <천고기청(天高氣晴, 2010)>은 이런 청곡의 작풍으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작품이라 꼽고 싶다. 하늘이 높다지만 가득한 단풍 위에는 수려한 준봉들이 하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바위산에도 단풍이 한창인 모양이다. 그 단풍은 엷게 붉은 색을 아주 살짝 머금고 있다. 그만한 색으로 그 모든 산의 붉음이 드러난다는 것이 신기해 보인다. 가운데 하늘로 솟구친 나무들이 낙엽을 반쯤 떨어뜨리고 가지를 드러낸 풍경 앞으로 외로운 산가와 어우러져 있다. 단풍이 짙다. 특히 갈필과 먹으로 음영을 낸 검은 그림자 위로 드러난 색이어서 그 가을은 더한층 붉음으로 가득해 보인다. 몇 점의 붉음과 보이지 않을 듯 덮인 붉음이 가득한 가을을 만들고, 한쪽에 국한된 붓길과 강한 먹색이 더없이 높고 맑은 하늘과 공기로 가득한 계절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강약이 어우러져 내는 맑은 효과가 돋보인다. 사계절을 산수로 담고 있는 팔곡병풍에는 이런 청곡의 예술세계가 가장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담채가 내는 색의 다양함과 가득한 운필의 맛과 먹빛의 농담이 그리고 있는 풍경들이다. 계절별로, 풍경별로, 그리고 화폭마다 시시각각으로 산수를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