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수, 진안에서 이완용의 초대받다
우리나라 제1의 ‘낙화(烙畵)’ 고장은 임실 지사였다. 박창규(朴昌珪, 1796-1861)의 낙화는 그의 종제와 후손을 중심으로 150여 년 동안 전통과 기법을 전승시켜 왔다.
박창규의 직계로 둘째 아들 남계(南溪) 박진욱(朴鎭郁, 1833~?)와 증손인 석천(石川) 박상필(朴相珌, 1895~?)이 있다. 송암(松庵) 박이규(朴履珪, 1819~?)와 운초(雲樵) 박훈규(朴勛珪, 1836~?)를 비롯, 죽파(竹坡)박진호(朴鎭灝, 1842~?), 월산(月山)박계담(朴桂淡, 1869~1948), 소산(小山) 박상전(朴相典, 1901~1959), 옥천(玉川)박상근(朴相根, 1907~?) 등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손자인 초산(蕉山) 박병수(朴秉洙, 1858~?)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행적이 소상하게 드러났다.
진안에 살던 그가 박창규의 손자 박병수가 진안현감 김승집(1826~?)의 눈에 든 일에서 비롯됐다.
그는 김승집의 동생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에게 소개됐고, 김홍집에 의해 일본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1918년에는 당시 백작이었던 이완용의 권유로 경성에 올라와 젊은이들에게 낙화를 가르쳤다. 이 일은 ‘매일신보’에서 자세히 전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에 따르면 진안에 거주한 박병수씨는 이완용 백작의 초청을 받았으며, 공진회때 히트를 쳤다는 사실이 나온다. 또, 박창규의 아들이 이를 배웠으나 손자 병수씨가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그는 김승집 진안현감이 알아줌은 물론 일본까지도 알려졌다. 이때 그의 나이가 60이었으니 그는 1858년생이다. 그의 낙화(烙畵)는 인두그림과 달리, 종이를 살짝 태우듯이 그리는 그림도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나무가 아니라 종이에 그리는 낙화기술은 중국이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박창규가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라고 본 점이다. 나무나 대를 인두로 지지는 기술을 비교적 쉽지만, 종이에다 종이가 상하지 않게 그림을 그린 것은 ‘특별한 묘득(妙得)’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기술로, 조선에서 다른 나라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 했다.
기사의 소제목을 “‘조선에서 발명되어 조선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달았는데, 이러한 인식이 일제강점기 때 널리 퍼졌다. 당시 구미 각국으로부터 낙화의 주문이 온다고 했으니, ‘낙화의 세계화’의 시동을 건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셈이었다”는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교수의 설명이다.
박병수는 박창규가 정립한 남종화풍의 낙화 기법을 근본으로 삼았다. ?박병수의 제자로 백남철(白南哲)이 소개됐으며, 그는 전주군에서 살았으며, 20세였다.
박병수의 제자 운포(雲浦) 백학기(白鶴起)는 전주출신으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화회(火畵會)’ 혹은 ‘낙화회(烙畵會)’라 해서 낙화 기술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한편 올 1월 ‘인두로 지져서 산수화나 화조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과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지칭’하는 낙화장(烙畵匠)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 김영조씨가 그 보유자로 인정됐다.
-매일신보 1918년 11월 5일자와 시대일보 1924년 9월 7일자 기사에 소개된 낙화
<시대일보> 1924년 9월 7일자에 소개된 조선낙화회(朝鮮烙畵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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