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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김평천선생의 후손을 찾습니다

 



조선독립을 열망했지만 순절후 외로이 잠들고 있는 김평천선생.
선생의 흔적은 남원시 금지면 호산마을 동산에 있는 사적비 비문엔 '평천김선생사적비'로, '금재문집' 17권엔 평천김공 순의비(平川 金公 殉義 碑)로 기록됐다. 하지만 출생과 사망, 더욱이 그의 이름마저 확인이 안되고 있다.
다만, '평천 김선생 사적비'는 1935년 3월 3일 '완산 최병심 글, 연안 이병일 글씨'로 돼 있을 뿐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구전에 따르면 일제때 일본 형사들이 그 비석을 알면 파괴할 까봐 모르게 현재의 자리로 숨겨 놓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20여년전까지 비석를 보러왔지만 전주인가 군산인가로 이사를 간후, 현재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사적비의 글을 지은 최병심(1874-1957). 호는 금재, 성리학자, 독립운동가로 '금재전집' 등 다수의 문집을 남기시고 일제때 독립운동 관련 투옥되기도 했으며 전주에 옥류정사와 염수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김용근 지리산 문화연구소장은 "금재선생이 비문의 글을 지은 점과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훌륭한 분이셨을 것"이다면서 "그러나 비문 이상의 발자취를 알수 없어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그를 기려보고자고 한다"고 했다.


평천 김공 순의비(平川 金公 殉義碑)

대방(帶方 지금의 남원(南原)의 호산(湖山)은 절사(節士) 고(故) 평천(平川) 김공(金公)께서 순의(殉義)하신 땅이다. 17년이 지난 뒤에 문인과 친구들이 장차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려 하면서, 공의 장손인 효술(孝述)로 하여금 내게 비문을 요청하게 했다. 내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행장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공은 휘 상각(相玉)이니, 경주 사람으로 고려 두문동(杜門洞)수은(樹隱)선생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걸출하여 가슴속에 충의(忠)가 가득하고, 시에 뛰어나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당세에 저명한 인사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로는 재주를 감춘 채 숨어살면서 교유를 끊고, 매일'이소경(離騷經)'·'애강남(哀江南)'.'출사표(出師表)'를 읽으면서 오열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무오년(1918) 섣달에 고종황제의 부음(音)이 이르자 곧장 고을의 인사들과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 망곡(望哭)하고, 이어서 각처에 있는 선대의 묘를 둘러보고 친척과 친구들을 일일이 방문하고는 돌아와서 유서를 썼으니, 대략에 이르기를 '아! 경술년(1910, 융희4)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내가 죽지 못했던 까닭은 우리 황제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대한(大韓)에 복을 내리지 않아 갑자기 황제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당하였으니 어찌 다시 살기를 바라겠는가. 성조(朝)에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서 어찌 차마 오랑캐의 세상에서 다시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였다. 또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백건(白巾)과 새 옷을 차려입고 북쪽을 바라보며 절하고 곡한 뒤에 독을마시고 돌아가시니 실로 기미년(1919) 1월 4일이었다"라고 했다.
삼가 생각건대, 선비나 백성은 임금에 대해서 비록 지킬 관직이나간할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는 피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왕기 (汪)의 죽음에 상례(禮)를 적용하지 않으신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임금이 죽자 남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공의 죽음은 임금을 저버리지 않고 선조를 욕보이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고,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 이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가리키면서그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이 남긴 행적을 드러내 비를 세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더욱더 공경하고 우러러보게 해 백대의 먼 훗날에도 혹 망실됨이 없을 것이니, 비석을 세우는 일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