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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와 원광대 한문번역연구소, '익산총쇄록' 번역 발간...익산군수 오횡묵은 11차례의 기우제를 지냈으나, 흉년을 당해 구제책 마련


‘익산총쇄록(叢瑣錄, 발간 익산시, 원광대학교 한문번역연구소)’은 당시 익산군수였던 오횡묵이 광무 4년(1900) 12월 29일부터 광무 6년(1902) 6월까지의 여러 기록들을 모아 놓은 글로, 당시의 익산 지역을 이해하는 기초자료다. '총쇄록(叢瑣錄)은 '소소하고 자잘한 기록들을 모아 놓은 글'이란 뜻을 지닌 책이다. 오횡묵이 1887년정선 군수로 부임한 이래 1906년 평택군수에서 면직될 때까지 9곳의 지방 수령을 역임하면서 각 지역에서 행한 일과 통치 내용 등을 세밀하게 기록해 24책으로 편찬했다.
오횡묵은 1900년 12월 익산군수에 임명되어 1902년 6월까지 재직하면서 지역과 관련된 각종 시(詩), 통치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기록하고 그 이름을 '익산 총쇄록(益山叢瑣錄)'이라 했다. 이 '익산 총쇄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자료에 의하면, 24책 중 16책(冊)과 22.23책에 실려 있다. 16책은 익산군수로 부임해 지은 시(詩)들을 모아 놓았으며, 22책과 23책은 익산군수로 전라북도 양무감리를 겸임했던 각종 업무 관련 내용과 기우제문, 편지, 교육 관련 하첩(帖), 훈령(訓) 등 익산군정과 양무감리와 관련된 내용들을 20개 항목으로 나누어 143편의 문장을 수록했다.
6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익산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1901년 봄부터 부딪친 일은 극심한 가뭄이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우제를 11회에 걸쳐 지내기도 하였으나 별 효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각종 시책을 실시하고, 전라북도 관찰부에 이러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공문을 올려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익산군수로 부임한 지 두 달 만인 1901년 2월 2일에 전라북도 양무감리로 임명되어 겸직하게 됐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여 건의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 고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체직을 청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있다.
오횡묵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시(詩)를 쓰고, 익산 지역과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며, 때로는 그 시(詩)들을 책으로엮어 선물하기도 하고, 파초 등 화훼식물들을 얻어서 훈지당 주변 경관을 꽃으로 조성하기도 한다. 한편 이전 군에서의 세전(錢) 문제로 평리원(平理院)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동이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평택 군수로 임명되면서 다시 힘을 얻게된다.
23책은 익산군에 있을 때 지은 것만을 선별해 놓았다. 이 '익산 총쇄록'은 '익산 총쇄록', '익산군 만록', '익산 만록'의 세 부분으로 명칭을 나누어 편집했다. '익산 총쇄록'의 내용은 16개 항목이다. 그중 편지인 서(書)가 41편으로 가장 많고, 기우제문(祈雨祭文) 11편, 훈령(訓)과 서문(序文) 8편, 설)과 전령(傳令) 6편, 기문(記文)·제사(題辭)·하첩(下帖)·송(頌)·제문(祭文)이 각각 3편씩이다. 그리고 고시(告示)와 지령(指令)·찬(贊)·명(銘)·발문(跋文)이 각기 1편으로 모두 97 편이다. 하지만 글들은 날짜나 시기에 대한 언급 없이 익산 군수와 전라북도 양무감리를 역임하면서 쓴 각종 글들을 선별하여 놓은 문집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전체적으로 시기적인 연결이 어렵다.
오횡묵의 익산군수로서 익산군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이름난 고을을 맡게 되어 간간이 지난날의 기록을 자세히 고찰하여 노더니, 익산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이 거주하여 세상에서 시부의 기북(冀北)이라 칭하였고, 마을마다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외우는 소리가 울려 퍼져 학문하는 사람이 많은 직하(稷下)였이 때문에 기린이나 봉황 같은 위인이 많은 곳이어서 상서로움을 늘수 있고, 진주나 보옥과 같은 인재가 모인 곳이어서 아름다운 작품을구하기 쉽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기쁘고 다행스럽지 않겠는가?"와 같이 익산 지역은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며, 유능한 지식인들이많은 고장이라는 인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오횡묵은 1900년 12월 29일 67세의 나이로 익산군수에 부임, 1901년 2월 2일에 전라북도양무감리를 겸하게 된다. 익산군수로 부임하기 이전에 근무했던 정선군, 자인현, 함안군, 고성부, 지도군, 여수군, 진보군 등지에서는 선치(善治)로 이름을 떨쳤다. 그뿐만 아니라 부임하는 지역마다 그 지역과관련된 자세한 기록인 '총쇄록'을 남겼다.
있다. 그리고 나머지 10편의 전령에서는 농사철에 성실히 영농에 임하라는 내용이나, 도로 보수와 저수지 등의 빠른 수리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한 호구조사를 강조해 비상시를 대비하고자 했으며, 군수가 순회할때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음식을 가져가겠다는 등 백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주지하고 있다. 또, 교육 분야에서는 도훈장, 면훈장, 리훈장 등을 두어 면학을 강조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한 전통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극심해 11차례의 기우제를 지냈으나, 유래 없는 흉년을 당하여 그에 대한 구제책 마련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뿐만 아니라 취미인 화훼를 통하여 못헌 주변에 화단을 가꾸어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 양무감리로서의 활동은 전임 양무갑리로부터 자세한 업무 이관이 되지 않아서 전례를 참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나름대로 조례를 만들기도 하고 중앙에서 내려보낸 훈령과 시행세칙 등을 척수(手), 위원(委員), 학원(學)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숙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즉시 해결하고 수시 순찰을 통해 민폐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양전 종사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복날이나 칠석날에 음식을 보내 그들의 노력에 격려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양전 비용 마련이었다. 양전의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 각 군에서는 공전이 없다는 이유로 지급을 거절하거나 기피하는 경우가 있어 더욱 어려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 중에 1901년 흉년으로 인하여 양전사업이 잠시 중단됨에 따라 그동안 실시한 6군의 양전 내용과 결산 내역 등을 보고하고, 체직을 청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이 익산군수에다가 전라북도 양무감리를 겸하여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당시 68세였던 오횡묵에게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가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익산 군수로 임명되기 전의 세전으로 여수군 16,000냥, 지도군 7,000냥, 진보군 2,000냥 등을 납부하지 못하여 평리원(平理院)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자 아들들이 놀라 빛을 얻어 대신 납부했다. 이에 각 군에 조사장부를 만들어 사람들을 보내 다시 조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 일로 많이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익산군에서 납부해야 할 세액이 걷히지 않아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그 마음속의 부담은 더욱 컸을 것이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술회부(述懷賦)를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평택군수로 임명되어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떠나려는 부산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