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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남원출신 조선 문인 장경세 ‘국역 사촌집’ 발간

남원출신 조선 문인 장경세 ‘국역 사촌집’ 발간

"굴뚝을 굽게 하고 섶을 옮겨놓으라고 한 사람에게는 전혀 은택(恩澤)이 없고, 또 머리를 그을리고 이마를 데인 사람은 도리어 상객(上客)으로 삼았네. 아득히 먼 구천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적이 까마득히 매몰되었으니 후세에 어떻게 기술하겠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이 지난 때, 한 선비가 산중 서재에서 홀로 책을 읽다 깜빡 잠에 들었다. 왜군이 조선을 다시 침략한 1597년 음력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을 맡아 순절한 친구 김경로가 꿈속에 나타나 원통함을 호소했다.

선비는 꿈에서 깬 후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충절을 기리고 원혼을 달래는 ‘김 장군을 꿈에 만난 일을 기록한 글’(夢金將軍記)을 썼다. 조선 선조·광해군 대에 남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촌(沙村) 장경세(1547~1615)의 이야기다.

조선 중기 문인 사촌 장경세의 삶과 문학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시문집이 우리말로 첫 번역됐다. 

조선대 고전번역연구회는 ‘국역 사촌집(沙村集)’(심미안 간)을 펴냈다. 

‘사촌집’에는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비분강개해 지은 87수의 ‘유선사’(遊仙詞)와 퇴계 이황의 ‘도산육곡’을 본 따 지은 한글가사(歌詞)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를 비롯해 110여편의 시와 기(記), 서(書), 설(說), 서(序), 행장(行狀), 제문(祭文)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홍석주는 서문에, “공의 시(詩)는 임진왜란 후에 지은 것이 많은데, 바야흐로 고달프게 떠돌고 전쟁에 시달리는 중에도 한 구절도 스스로 가엾게 여기는 말이 전혀 없고,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돌보고 사랑함에 측은하고 슬프며 침울한 것은 두보의 밥 한 끼를 먹을 때도 임금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장경세는 강호에서 충군애민하며 유유자적한 유선(儒仙)이라 불릴 만하다.

그는 흥덕 장씨(興德張氏)로 1547년 남원에서 태어나 1589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전라도도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02년에 노모를 모시기 위해 금구현령을 자청했고 이듬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제호 양경우, 폄재 최온, 농포 정문부 등과 도(道)로서 교분을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정도로 문장과 도덕이 높았다.

사촌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부사와 협력해 군량미 비축과 군정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이후 광해군의 실정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버리고 남원 주포촌에 은거하며 제호(霽湖) 양경우 등 후학을 양성하고 어우(於于) 유몽인 등 여러 문사들과 교유했다. 
불우하게 낮은 관직으로 1615년(광해군7)에 일생을 마쳤다. 남원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사촌장선생문집’은 7세손(장윤)에 의해 사후 200여년 후인 1824년에 목활자본(4권2책)으로 간행됐다. 조선대 고전번역연구회 역자들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돼 있는 시문집 초간본을 저본으로 해 우리말로 번역했다.

조선대 고전번역연구회 김순석 박사는 해제 ‘강호에서 충군애민하며 유유자적한 유선(儒仙), 장경세’를 통해 “본 번역서를 통해 연구자들이 저자의 시문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분석하고 연구한다면 우리 한문학사에 유익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단편적으로만 알려진 사촌 장경세의 문학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http://sjbnews.com/news/news.php?number=76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