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문 스토리] 당신, 나를 믿나요. 배신하면 곤란해요
- 신태보 베드로와 전주 막걸리
신태보(申太甫) 베드로(1768~1839)는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태어나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바르바라)가 며느리입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후 용인 순교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다가 다른 교우들과 연락해 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 싶었지만, 비밀리에 활동하던 주 신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후 그는 마을에서 12㎞가량 떨어진 곳에 순교자 유가족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에 4~5번 가량 찾아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는 주신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유족들을 통해 주 신부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신자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고 성직자 영입에 동참했습니다. 1811년 당시 교회지도자들은 교황과 베이징주교에게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복자도 함께 서명했다. 베이징에 파견된 밀사는 사촌인 이여진이었고, 그는 그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신자들을 찾고, 교회 서적을 필사해 신자들에게 나눠주다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했습니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그 소식을 듣고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복자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박해 중 그가 전주지역 신자들에게 나눠준 교회 서적이 발각됐고, 박해자들이 복자의 거주지까지 입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체포 영장이 자기 고을이 아닌 전라감영에서 발행한 것을 보고 포졸들을 따라 나서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포졸들은 다른 마을에 사는 신자를 체포하러 갔다가 협박과 완력으로 주민들에게 많은 양의 술을 내오게 했고 닭들을 제멋대로 잡아먹는 등 가난한 주민들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습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후, 그는 포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전주 전라감영 진영 포졸들이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놀음을 하는 동안 신자들에게 일이 되어 가는 사정을 보니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전주로 압송돼 고된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그는 관장에게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를 따를 뿐”이라면서 “순경에 있을 때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에 처해서는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요,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당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라고 말했다. 이어 관장에게 “법대로 처리하라”면서 자신은 “신념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했습니다.
"밥냄새를 맡으니 구역질이 나서 조금도 먹지 못하니 포졸이 탁주(막걸리) 한 사발을 내 입에 갖다대어 주기에 조금씩 몇 모금을 마셨다. 곧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첫날 신태보는 고문에 이미 앉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큰칼을 씌워 밤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버티며 샤스탕 신부의 명에 따라 자신이 박해를 받으며 겪은 일을 기록해 ‘옥중수기’를 남겼습니다. 수기는 당시 옥중 생활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신자들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깊은 신앙을 가졌는지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수기에 따르면 그는 다리 살이 헤어져 뼈가 드러나 보였고, 상처가 곪아 심한 악취가 풍겨 복자 주변에 사람들이 가까이 올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지독한 옥살이 중 때때로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했고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에 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 샤스탕신부(St. J. Chastan, 鄭)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 다리는 살이 해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지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 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 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했다.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고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며,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다리엔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았고 뼈만 허옇게 드러났다. 나는 앉지도 못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어서 매일 탁주 두세 사발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도 내 곁에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내 옆으로 지나갈 때면 코를 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옥간엔 이 빈대 벼룩이 득실거려서 누구도 그것들을 배겨낼 수 없었다. 다행히 몸 상태가 양호한 교우가 몇 명 있어서 내가 몸을 좀 움직일 수 있도록 그들이 나를 부축해 주기도 하고 또 배설물도 치워 주었다. 그 고마움을 어찌 다 갚을꼬?"
"나는 가슴이 죄어 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옥사쟁이가 와서 나보고 음식을 먹으라고 또 다그치지만, 나는 이제 죽음도 헛된 것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기가 꺾이고 한스럽고 화가 치밀어 마음이 저만치 달아나 내게 밥을 주는 사람들을 퉁명스럽게 되돌려 보냈다. 그래도 거듭 권유하는 바람에 나는 술만 몇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혼자 생각하기를, 영장이 예수를 말하려 했다 해도 나는 어김없이 야소로 들었으니 천주께서 나를 용서해 주실까 하며 마음을 다독여 보려고 애써 보았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에 대해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했고,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신태보는 감사(監司)의 심문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했습니다.
『신주를 모셨느냐?』
『신주는 없습니다.』
『어째서 없는고?』
『몰락한 가정에 독신으로 남아 집도 없어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 모실 자리도 없어 가지고있지 않습니다』
『그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
『제사날이 되면 그저 음식이나 제 처지에 맞게 준비해가지고 이웃사람과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면 꿇어 엎드려 절도 하지않고 먹는단 말이냐?』
『절은 하지 않습니다』
박해시대 교우들은 조상의 제사날 음식을 만들어 놓고 교우들끼리 모여 연도를 바친후 음식을 나누어 먹은 듯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전주 숲정이(전주 장터로도 기록)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70살 가량이었습니다.
막걸리는 '(이제)막,걸리다'가 '막걸리'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요?
'나는 술을 좋아하되/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막걸리는/아침에 한 병(한 되)사면/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생각날 때만 마시니/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마누라는/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다만 이것뿐인데/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막걸리는 술이 아니고/밥이나 마찬가지다/밥일 뿐만 아니라/즐거움을 더해주는/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천상병 '막걸리')'
막걸리 한 잔에 하늘 높이 솟구친 가오리연의 행방을 찾지 못해서 인가, 꿈과 소망은 아련한 기억 저편 너머로 잠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떠났기 때문인가요.
시나브로 적막함 만이 오후의 햇살과 함께 녹아내리며 부챗살처럼 펼쳐집니다.
황톳빛 이 땅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대로인데, 회상의 그림자만 푸른 솔가지에 걸어놓은 채 우리네 인간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사라져 가누나. 이같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뭇가지가 잔잔하게 흔들립니다.
한적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봅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고요히 자리잡은 마을 어귀에서 당산나무를 만나는 오늘, 살듯한 풍경이 수묵담채화처럼 펼쳐집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득하기만 한데, ‘오도독’ 눈깔사탕 하나 한입 물고 단내음을 음미하니 옛 일이 감미롭습니다.
주막집을 들르는 사람마다 막걸리 한두 잔쯤을 담아 마신 사발, 내 앞에 간 수 많은 이들이 고단한 여로에 잠시 목을 축였고 내 뒤에도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입술을 댈 '이 빠진 낡은 사발'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메신저입니다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도 사람들이 푸대접받을 때 항의조로 흔히 쓰는 말이지만, 거시기는 몰라도 홍어 자체는 결코 만만히 볼 생선이 결코 아닙니다.
술꾼들이 모이는 술시가 아직 멀었는데 ‘홍탁삼합(洪濁三合)’ 생각이 간절해 사무실의 일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홍어의 ‘홍’자와 탁주(막걸리)의 ‘탁’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홍탁(洪濁)’입니다.
삭힌 홍어의 톡 쏘는 맛과 탁주의 텁텁한 맛이 어울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조합을 이룹니다. 홍어를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술꾼들은 여기에다, 비곗살이 붙은 삶은 돼지고기에 묵은 신김치까지 곁들여 먹는데, 이를 ‘홍탁삼합 (洪濁三合)’이라고 해 최고의 안주로 쳐줍니다.
기름지고 차진 돼지고기와 성질이 찬 홍어를 묵은 신김치에 곁들어 먹고 따듯한 성질의 막걸리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런지요.
소설가 황석영은 이를 두고, ‘혀와 입과 코와 눈과 모든 오감을 일깨워 흔들어버리는 맛의 혁명’이라고 예찬한 바 있죠.
요즘들어 막걸리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막걸리는 죽은 술이 아니라 숨을 새록새록 쉬는 효모가 살아 있는 술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 밥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나그네가 어릴 때에도 "탁주 반 되는 밥 한 그릇"이라 하여 막걸리 두어 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르신들도 더러 있었지요.
전, 막걸리를 참 좋아합니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소주를 마시는 것 빼곤 막걸리를 고집합니다. 막걸리를 적당히 마신 다음 날 아침엔 몸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막걸리 한 병에 든 유산균, 요구르트 100병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손님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상대편과 대화조차 나누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 잔의 막거리를 마시고 있으면 시끌벅적 막걸리가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긴 해도 사람 사는 내음이 납니다.
어릴 때 논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중참으로 들고 가다가 주전자에 입을 대고 쫄쫄 빨아먹었던 막걸리. 그 시큼 달큼했던 막걸리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마셔 보세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텁텁하기만 한 우리네 인생에 막걸리가 닿는 순간 달착지근하게 바뀔 겁니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깔개로, 산을 배개로 누워 보니,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인데, 바다는 술통처럼 넘치는구나. 맘껏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봐 걱정이네’
모악산 수왕사 등에서 수도한 전북출신 진묵대사가 지은 작품으로, 방랑시인 김삿갓도 감탄했다는 바로 그 시입니다.
오늘처럼 더운 바람이 가슴을 후벼드는 날엔 ‘홍탁삼합’을 안주삼아 진묵대사처럼 하늘을 장막삼고 땅을 자리삼아 술이 아닌, 곡주(穀酒)를 마시고 싶습니다.
자칫 정신줄을 놓고 길바닥에 자면 안될 정도의 양을 마시기에 술 이라고 부름을 사양합니다. 하얀 달빛을 벗삼아 ‘곡주’ 한 잔하며, 세상의 시름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이제, 사랑이 막,걸리다
이제, 우정이 막,걸리다
이제, 희망이 막,걸리다
이제, 행복이 막,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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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는 주리를 트는 모진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주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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