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문 스토리] 전통은 ‘굿(Good)’을 지르면서 삼백예순다섯날 신나게 노는 일입니다.
-김제출신 석정 이정직의 '농악(農樂)' 시를 찾다
농민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풍농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행하는 제반 문화 현상 '농악(農樂)'을 가리켜 풍물굿, 풍장굿, 두레굿, 매구라고 부르기도 하고, 단순히 ‘굿’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 연행 주체나 목적에 따라 마을굿, 당산굿, 걸립굿, 판굿, 마당밟기(뜰밟기)라고도 하며, 연행 시기에 따라 대보름굿, 백중굿, 호미씻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농악을 굿이라고 부르고 세시놀이와 관련하는 것은 농악이 단순한 연희 혹은 놀이가 아니라 각종 세시명절에 연행되어 벽사진경과 감사제라는 민간신앙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농악은 농사일의 고된 노동을 공동체적 신명으로 푸는 중요한 기능을 지닙니다.
농악(農樂)이란 이름이 일제강점기 우리 풍물을 농사(農事)에 제한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들 합니다. 농악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정병호의 '농악'에서도 그렇게 주장했고, 여타 전문 연구자들도 그렇게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사용한 이름이 '풍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풍물을 축소하여 농악이란 이름으로 호명한 것이 아니라, 농악을 오히려 축소해 풍물이란 이름으로 호명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풍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저간의 역사와 활동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농악이란 이름 혹은 울림이라는 정체를 올바로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초의 마당밟이와 지신밟기에 포섭된 벽사(闢邪)적 기능뿐 아니라 대지와 천상의 신을 울리는 신명의 기능을 염두에 두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희태가 오랫동안 이를 주장해왔습니다. 그가 발굴한 여러 자료를 통해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뿐만 아니라 그 맥락에 대해 더욱 견실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은 보성에서 농악을 보고 지은 시입니다.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김희태 초역)
기 하나 우뚝 세우고 동풍이 휘몰아 불 때
너른 들에 색옷 입고 북치며 뛰노는 아이들
변방은 이미 평안하고 농사는 철이 이르지만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인지 비로소 깨달았네.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박명희 감수)
우뚝 선 한 깃발에 동풍이 휘몰아 불 때
너른 들에 북 치며 색동옷 입고 너울너울
변방 일 이미 평안하고 농사철 빨라지니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을 비로소 깨달았네
流頭觀農樂 / 匆旗一建颺東風 擊鼓郊原舞綵童 邊事已平農事早 始覺吾君聖德鴻
16세기에 농악이란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 1890년대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농악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습니다.
'매천야록'에는 "대개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농민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논을 맸다. 이것을 농악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남의 부호 오영석(湖南之富 有吳榮錫者)'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호남의 부호 가운데 오영석(吳榮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벼는 1만석쯤 됐다. 민영환(閔泳煥)은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문하에 출입하게 했다. 서울 사람들은 그를 오금(烏金)이라고 했다. ‘오(吳)’와 ‘오(烏)’는 같은 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蔭仕)로 누차 군읍(郡邑)의 수령을 지냈는데, 그가 임피(臨陂)의 수령로 있을 때, 궁전내 별도의 하급 관청에서 놋쇠 그릇인 유기(鍮器)를 5그릇씩 500쌍을 바치라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유기를 마련할 수 없으므로, 가격을 배나 주면서 민가에서 구입하여, 여러 마을의 징과 꽹과리가 모두 바닥이 났다. 대개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농민들은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서로 논을 맸다. 이것을 일러 ‘농악’이라고 부른다. 징과 꽹과리는 놋쇠와 백철(白鐵)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
湖南之富 有吳榮錫者 庄租亦稱萬石 閔泳煥引之出門下 京師目以烏金ㅠ以吳烏同音也 蔭仕屢典郡邑 其令臨陂也 內下別卜 定鍮錫五盒五百事 倉卒無以辦 倍價購貿于民間 數郡錚鐃之屬皆盡 盖野鄕夏月 農人擊錚鐃 以相鋤耘 謂之農樂 而錚鐃非鍮錫不能鑄也
충청도 서천 유생 최덕기(崔德基, 1874~1929)가 쓴 향촌일기 '갑오기사(甲午記事)'에도 농악이 나옵니다.
일기 가운데 1894년 9월 어느날 조에 '밤 삼경에 촌민이 많이 이동하면서 농악을 두드렸다(夜三更村民大動擊農樂)'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김제출신 근대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의 저서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
,전북 유형문화재 제149호, 지정명칭 석정 이정직유저 유묵'에는 시 제목을 아예 '농악'으로 뽑았습니다.
제5책에 ‘농악(農樂’ 제목의 시가 있다. 5언 44구의 장편시로 단연 압권입니다. 2001년 김제문화원이 '연석산방미정시고'를 번역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이 시를 소개합니다.
적 잡으려면 먼저 괴수를 잡아야 하고
풀을 제거하려면 뿌리를 제거해야 하는 법
그러므로 농정회(農丁會)가 있나니
그 인원의 통제는 군대 통제 같구나
구리 나발은 처음에 장하게 뿜어내고
행군하는 깃발은 상대하여 벌려 펄럭이네
쌍 징의 울림은 절도 있고
양 북의 소리는 깊이 울리네
처음에는 느린 소리 지었다가
점점 번잡한 음으로 퍼져가네
덩실덩실 춤을 추려는 듯
빙빙 돌아 어지러이 서로 향하네
습관적으로 손은 마음 따르고
흥 오르면 머리와 발이 응하네
율려(律呂) 분별할 줄 모를 뿐 아니라
궁각(宮角)이 있는 줄 어찌 알리오
장장(鏘鏘) 다시 쟁쟁(鎗鎗)
감감(坎坎) 또 전전(闐闐)
음은 마음 좋아하는 바 따르고
절주는 자연스레 어울리네
또한 큰 사라(沙羅) 있어
요란한 소리 멀리 진동하네
곡 끝남에 울림 서로 합하여
흡연히 한 끝 가락 이루네
이사(里社)에는 단란히 무리 지은 짝이요
밭에 임하면 힘써 밭 갈아 김매도다
행동거지 어쩌면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나누어진 행렬 섞여 얽히는 법 없네
일찍이 들으니 요임금 시대엔
격양(擊壤)이란 옛 놀이 있었다지
시속에서 숭상하는 바는 다르지만
즐기는 뜻은 응당 다르지 않네
먹고 마시며 밭두둑에서 쉬니
푸른 풀 자리로 삼네
질그릇 동이에는 탁주 넘치고
주고 양보하고 더욱 순박하네
저녁 노을은 안개 낀 나무에 빛나니
찬연한 비취 빛 섞여 비단결 같네
술 취한 채 마을로 돌아오니
맑은 바람 베옷 소매에 일어나네
밤 중 거닐며 다시 한 번 베푸니
여음이 느린 걸음을 따르네
이는 실로 상고(上古)의 풍류러니
어찌 소호(韶頀)보다 못하리오.
'농정회(農丁會)'는 농사를 짓는 정정을, 율려는 음악 또는 음성의 가락, 궁각은 오음(五音)에 해당하는 2개의 음을 의미한
합니다.
'감감'은 북치는 소리를, '전전'은 북소리를, '사라'는 일종의 타격하는 기구로 행군할 때는 손씻고 세수하는 용기로 씁니다.
'이사'는 마을에서 지신(地神)을 위해 만든 사당을, '격양'이란 목제구를 땅에 세우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른 목제구를 던져 놀던 놀이를 말합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쉰다(日入而息)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鑿井而飮)
밭을 갈아서 먹으니(耕田而食)
제왕의 힘인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帝力干我何有哉)
이는 요나라 때 태평세월을 구가(謳歌)한 노래로 악부(樂府)의 잡요가사(雜謠歌辭) 중의 하나입니다.
'격양가'는 ‘땅을 치며 노래한다’는 뜻이며, 이 노래는 요나라 때 지은 노래라 합니다. '격양'이란 원래 나무를 깎아 만든 '양(壤)'이라는 악기를 친다는 뜻과, '땅(壤)'을 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과연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평민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습니다.
넓고 번화한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래 부르며 놀고 있어 그 노랫소리를 유심히 들었습니다.
우리 백성들을 살게 하는 것은 (立我烝民)
그대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 (莫匪爾極)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不識不知)
임금의 법에 따르고 있다 (順帝之則)
그 뜻은 임금님이 인간의 본성에 따라 백성을 도리에 맞게 인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이니 정치니 하는 것을 염두에 두거나 배워 알거나 하지 않아도 자연 임금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 노래를 강구가무(康衢歌舞)라고도 합니다.
임금은 다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또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 (日出而作), 해가 지면 쉰다 (日入而息),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鑿井而飮), 밭을 갈아서 먹으니 (耕田而食),
제왕의 힘인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帝力干我何有哉).
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크게 만족하여 “과시 태평세월이로구나” 했습니다.
그 후, ‘격양가(擊壤歌)’란 말은 풍년이 들어 오곡이 풍성하고 민심이 후한 태평시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고시대 농경사회에서 어떤 놈이 왕인지 알 필요가 없이 격양가를 불렀던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차라리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터득한 원시의 무애(無碍)일 것입니다.
'소(韶)'는 순임금이 지은 음악, '호(頀)'는 은나라 탕왕이 지은 음악입니다.
웃다리농악은 충청·경기지역의 농악을 가리킵니다. 웃다리농악의 가락은 종류가 많지 않은 반면 변주가 다양하고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으며,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칠채가락’과 ‘무동타기’로서, 황해도 일부 지역의 농악과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징징 박박' 휘몰아치는 풍물의 흥이 더 없이 좋은 야외 무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자 질펀한 놀이터에 만들어진 신명의 자리는 더 깊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광수명인은 그 옛날, 횃불에 비치던 예인의 그림자처럼 오늘도 신명나는 꽹과리 가락을 선사합니다.
2014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이리농악·임실필봉농악과, 시도지정 무형문화재인 김제농악·정읍농악·고창농악·부안농악·남원농악 등 모두 7개 농악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그후 진안 진안 증평농악과 익산 성당포농악이 전북 문화재 반열에 올랐습니다.
호남농악의 상쇠들은 상모라는 모자를 쓰는데, 그 위에 다는 날짐승의 깃털장식을 '부포'라고 부릅니다. 우도의 상쇠는 뻣뻣한 대공 위에 정연하게 깃털을 꽂은 '뻣상모'를,(전라)좌도의 상쇠는 삽살개의 꼬리처럼 부들부들한 '부들상모'를 씁니다. 여성농악단 출신의 유지화와 유순자는 우도 부포춤의 명인이고, 고 류명철은 좌도 부들부포춤의 마지막 기능자였습니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북을 들고 추는 소고춤은 모자에 따라 춤이 다릅니다. 우도의 고깔소고춤은 상모에 꽃을 달고 추며, 좌도의 채상소고춤은 긴 종이띠를 단 상모를 돌리면서 추는 기예적인 춤입니다.
정인삼은 우도농악의 소고춤을, 김운태는 여성농악단에서 추던 채상소고춤을 추고 있습니다.
전주농악을 조사해보면, 과거에는 호남좌도농악의 세력이 전주농악을 상당히 강력한 힘으로 지배한 사실들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이후 점차 호남우도농악의 영향력이 전주농악에 강화되면서, 전주농악은 ‘우도형 중간굿’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이런 변화/변이의 과정은 모든 민속예능에서 부단히 계속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민속예능을 조사 · 연구할 대에는 항상 이 점에 유념해야만 합니다.
전주농악을 놓고 볼 때에도 과거 좌도농악의 지배력이 강하던 시기의 농악에서 오늘날 우도농악의 지배력이 더 강화된 시대의 농악으로 변화/변이되어온 그 전체 과정을 모두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지금의 전주농악의 실제 현상을 전주농악의 실체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문화재가 안돼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얼씨구~절씨구 우리 농악 구경가세.
쿵쿵 덩덕쿵, 깨갱깽깽깽 신나는 장단에 덩실 덩실 춤도 춥니다.
우리네 전통은 ‘굿(Good)’이라는 소리를 이구동성으로 지르면서 삼백예순다섯날 신나게 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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