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성이 1647년 11월 기록한 흥덕과 고창의 기사
'춘향전' 이도령 실제모델인 성이성이 인조25년(1647) 다시 호남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호남 각지를 다니며 감찰한 뒤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를 호남암행록이라고 합니다. 이 일기 12월1일에 보면 남원 광한루에서 어릴적 옛일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11월 14일
새벽에 길을 떠났다. 흥덕(興德) 땅에서 아침을 먹었다. 흥덕현을 멀지 않게 바라보면서 비가 내리는 것을 무릅쓰고 출발했다. 저녁에 이준(李俊)에게 따로 떨어져서 가도록 지시했다. 이준에게 고창(高敞) 읍내의 아랫마을에서 묵도록 지시하고 나는 윗마을에 있는 이득립(李得立)의 집에서 묵었다. 이득립은 나이가 예순이 다 되어 갔지만 순박하고 정직했다. 한 방에 같이 앉아서 고창현에 관계된 사항들을 자세히 물었다. 이득립은 전후 현감들의 정치 상황을 매우 상세하고 분명하게 줄줄이 이야기했다.
곧바로 현임 현감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88년(선조 21년)생으로 위로는 팔순의 노친이 계시고 아래로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지요. 별달리 백성들을 수탈한 일은 없습니다만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는 날이 없고 취했을 때는 전혀 일을 돌보지 않습니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요즘은 황달 증상이 있어서 많이 마시지는 못합니다.” 해가 지자 그의 아들 신길(信吉)이 공관에서 돌아왔다.
연락해서 오도록 하여 밤늦도록 이야기했는데 말하는 내용이 그의 아버지와 꼭 같았다. 내가 상세하게 묻자 신길은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하다가 끝에 가서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사또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혹시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인지를 물었다. 전주에 왔을 때 나도 들었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신길이 말했다. “우리 사또의 자제가 연지동(蓮地洞)에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알려오기를 ‘대간(臺諫)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어사의 행장을 차리라는 명령이 있었다고들 합니다.’라고 했고 오늘 아침에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우리 사또에게 편지를 보내 어사가 만경(萬頃)에 당도해서 며칠 동안 경내에서 나가지 않고 있어서 만경 사또가 움츠려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11월 15일
새벽에 길을 나서 고창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집주인이 하는 말이 간밤에 들었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서리(書吏)가 밤부터 아침까지 들었던 내용도 대동소이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흥덕에 도착해서 길가의 집에 들어가 말을 쉬게 하였다. 고창현에서 10리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고창 사또에 대해서 곧잘 말했다. 날이 저물자 정읍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진 후에 서리(書吏)를 보내 정읍 사또에게 식량을 받아왔다. 사또가 관아의 노비를 거느리고 걸어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이종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 있는 자료를 일부 정리하여 게재한 것임
'춘향전' 이도령 실제모델인 성이성이 인조25년(1647) 다시 호남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호남 각지를 다니며 감찰한 뒤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를 호남암행록이라고 합니다. 이 일기 12월1일에 보면 남원 광한루에서 어릴적 옛일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11월 14일
새벽에 길을 떠났다. 흥덕(興德) 땅에서 아침을 먹었다. 흥덕현을 멀지 않게 바라보면서 비가 내리는 것을 무릅쓰고 출발했다. 저녁에 이준(李俊)에게 따로 떨어져서 가도록 지시했다. 이준에게 고창(高敞) 읍내의 아랫마을에서 묵도록 지시하고 나는 윗마을에 있는 이득립(李得立)의 집에서 묵었다. 이득립은 나이가 예순이 다 되어 갔지만 순박하고 정직했다. 한 방에 같이 앉아서 고창현에 관계된 사항들을 자세히 물었다. 이득립은 전후 현감들의 정치 상황을 매우 상세하고 분명하게 줄줄이 이야기했다.
곧바로 현임 현감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88년(선조 21년)생으로 위로는 팔순의 노친이 계시고 아래로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지요. 별달리 백성들을 수탈한 일은 없습니다만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는 날이 없고 취했을 때는 전혀 일을 돌보지 않습니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요즘은 황달 증상이 있어서 많이 마시지는 못합니다.” 해가 지자 그의 아들 신길(信吉)이 공관에서 돌아왔다.
연락해서 오도록 하여 밤늦도록 이야기했는데 말하는 내용이 그의 아버지와 꼭 같았다. 내가 상세하게 묻자 신길은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하다가 끝에 가서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사또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혹시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인지를 물었다. 전주에 왔을 때 나도 들었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신길이 말했다. “우리 사또의 자제가 연지동(蓮地洞)에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알려오기를 ‘대간(臺諫)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어사의 행장을 차리라는 명령이 있었다고들 합니다.’라고 했고 오늘 아침에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우리 사또에게 편지를 보내 어사가 만경(萬頃)에 당도해서 며칠 동안 경내에서 나가지 않고 있어서 만경 사또가 움츠려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11월 15일
새벽에 길을 나서 고창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집주인이 하는 말이 간밤에 들었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서리(書吏)가 밤부터 아침까지 들었던 내용도 대동소이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흥덕에 도착해서 길가의 집에 들어가 말을 쉬게 하였다. 고창현에서 10리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고창 사또에 대해서 곧잘 말했다. 날이 저물자 정읍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진 후에 서리(書吏)를 보내 정읍 사또에게 식량을 받아왔다. 사또가 관아의 노비를 거느리고 걸어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이종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 있는 자료를 일부 정리하여 게재한 것임